죽어가는 자본주의

출처: Preetam Parikh, Unsplash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노후화하고 있다는 징후가 오늘날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가 이런 징후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14년부터 1945년 사이에도 같은 징후가 나타났으며, 이는 자본주의가 사멸해 가는 체제라는 레닌의 예견을 확인해줬다. 당시와 지금의 차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을 덮친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느냐에 있다.

당시 자본주의 체제는 의도했든 상황에 떠밀렸든 적어도 세 가지 뚜렷한 방식으로 자신을 개혁하며 대응했다. 첫째, 당시 윈스턴 처칠과 같은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던 정치적 탈식민화를 받아들이는 한편, 3세계의 자원을 다른 수단을 통해 통제하려 했다. 둘째, 세계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11표에 기반한 선거 민주주의를 광범위하게 도입했다. 셋째, 국가는 실업을 줄이기 위해 총수요를 촉진하는 개입 정책을 채택했다. 유럽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복지지출 확대로 나타났고, 미국에서는 폴 바란(Paul Baran)과 폴 스위지(Paul Sweezy)가 나중에 보여줬듯이 군사비 지출 확대로 나타났다. 마지막 개혁은 특히 중요했다. 앞의 두 가지 변화가 자본주의 체제에 가할 수 있었던 위협을 견디면서 체제가 살아남도록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태에서 작동하며 사회주의보다 인권을 더 잘 보장하는, 인간적이고 더 민주적인체제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면서 존립의 위기를 극복했다. 그리고 제3세계 전역에서 지도자들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조종하는 온갖 음모를 벌였음에도 새로운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모하마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도자가 그 희생양이 됐으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이라는 끔찍한 전쟁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알려진 새로운 국면을 열면서 존립의 위기를 극복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이는 실제로 비교적 새롭고 다른 자본주의의 국면이었다.

당시의 존립 위기와 현재의 위기를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를 짓누르는 경기침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총수요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국가가 개입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총수요를 늘리기 위한 정부지출 확대가 효과를 내려면 재정적자를 늘리거나 부유층에 세금을 부과해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어차피 소득 대부분을 소비하는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그 세수를 지출하면 총수요의 규모가 아니라 구성만 바뀔 뿐이다. 그러나 금융자본은 재정적자와 부유층 증세를 모두 싫어한다. 금융자본가 자신이 대개 최상위 부유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 금융은 세계화됐지만 국가는 여전히 국민국가로 남아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의 반대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를 무시하면 치명적인 자본 유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괴롭히는 경기침체의 위기에서 벗어날 돌파구는 없다.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엄청난 소득 불평등의 심화가 초래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막다른 골목(cul-de-sac)에 들어섰고, 바로 이 상황이 오늘날 나타나는 쇠퇴의 징후를 낳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징후는 자본주의가 과거에 내세웠던 자기 이미지와 정반대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 곳곳에서 신파시즘 정권이 노골적으로 등장하거나, 민주주의의 외양을 유지하면서도 정부 정책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표출하려는 모든 시도를 매카시즘식 마녀사냥으로 탄압하는 억압적 정권이 등장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세계의 정부들은 스페인과 같은 몇몇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광범위하게 지지하고 있다. 정작 이들 국가 국민의 다수는 집단학살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데도 정부는 이를 지지할 뿐 아니라 이에 반대하는 대중의 모든 의사 표현을 가혹하게 탄압한다. 반대 의견을 관용해 왔다고 자부하던 영국에서는 학생들이 단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리스트혐의를 받고 재판에 넘겨지고 있다. 더구나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재판에 넘겨지기는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는다.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예를 들어 독일의 대부분 도시에서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기 위한 집회 개최를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인권을 수호한다는 주장은 집단학살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로 허구임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전후 시대에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민주주의를 대폭 축소하는 조치까지 뒤따르고 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다시 억압으로 돌아서는 동시에, 적어도 지금까지 미국은 제3세계를 다시 식민화하려는 시도에도 나서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런 의제를 노골적으로 선언했을 뿐 아니라 베네수엘라에 실제로 침입하고, 이란을 상대로 군사적 침략을 계속하며, 그린란드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 가능성까지 검토하면서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미국은 이런 공격적인 행보에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도 동참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미국은 이미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두 가지 중대한 조치를 취했다.

첫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장해제했던 독일과 일본을 재무장하는 것이다. 두 나라는 재무장 제안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 역시 자본주의가 이른바 황금기 이전시대로 되돌아가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더구나 독일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라는 형태로 신파시즘이 강력하게 부상하는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이 초래할 극도로 위험한 결과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둘째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이 2035년까지 군사비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무려 5%까지 늘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가운데 3.5%는 핵심 군사 활동에, 1.5%는 군사 인프라 구축에 지출할 예정이다. 이는 현재 미국의 GDP 대비 3.4%, 유럽 평균 2.5% 수준인 군사비 지출을 대폭 끌어올리는 조치다. 재정적자 확대와 부유층 증세를 가로막아 케인스주의적 총수요 부양책을 어렵게 만드는 것과 똑같은 제약이 군사비 확대에도 작용한다. 따라서 NATO 국가들이 군사예산을 늘리려면 복지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으며, 적어도 유럽에서 복지지출은 전후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핵심 요소였다. 결국 우리는 다시 한번 전후의 관행과 정반대인 대규모 군국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유럽의 부르주아 여론이 식민주의의 폐해를 지적해 온 반식민주의 운동의 주장에 혹시라도 영향받았을까 우려했는지, 최근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뮌헨안보회의에서 서구가 세계를 지배했던 지난 5세기를 찬양하며 과거의 영광을 되살려야 한다고 거리낌없이 주장했다. 관측자들은 이를 명백한 재식민화 요구로 받아들였다. 루비오는 유럽 동맹국들에게 식민지배의 과거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다고 장담했다. 사실상 유럽의 모든 지도자가 참석한 청중은 그의 연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환영했다.

파시즘은 언제나 식민주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물론 파시즘이 등장하는 맥락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대안적 담론이 필요해지고, 파시즘이 이를 제공한다. 하지만 파시즘이 채택한 폭력적인 수법은 식민지에서 먼저 시험했다. 예를 들어 독일이 나미비아의 나마족과 헤레로족을 비인간적으로 탄압한 사건과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이 콩고에서 자행해 인구를 1,000만 명, 3분의 1이나 줄인 집단학살은 이후 유럽에서 파시즘이 저지른 일의 모델이 됐다.

따라서 오늘날 신파시즘의 확산과 식민주의의 과거를 향한 향수, 그리고 눈앞에 다가온 재식민화 프로젝트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다시 한번 자신의 맨얼굴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다. 전후 시기에는 간헐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감춰왔던 모습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이처럼 극도로 무자비한 본성으로 회귀하는 것은 복지 자본주의’, ‘변화한 자본주의’, ‘인간적인 자본주의에 관한 모든 선전을 완전히 부정하며, 동시에 자본주의의 쇠퇴와 절박함, 노후화를 보여주는 징후다. 자본주의가 뚜렷한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는 징후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죽어가는 자본주의의 징후다.

그러나 극도로 공격적이고 억압적인 자본주의로 회귀한다고 해서 체제를 구할 수는 없다. 죽어가는 자본주의는 신파시즘과 민주주의의 파괴, 재식민화를 통해 스스로를 구할 수 없다. 오늘날 이란을 상대로 벌이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략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가 이를 충분히 입증한다.

[출처] A Dying Capitalism | Peoples Democracy

[번역] 하주영 

덧붙이는 말

프라바트 파트나익(Prabhat Patnaik)은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 평론가다. 그는 1974년부터 2010년 은퇴할 때까지 뉴델리의 자와할랄 네루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 연구 및 계획 센터에 몸담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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