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추상화: 우크라이나, 대리전의 역학, 그리고 노동계급의 실종

출처: 세르히 누즈넨코(Serhii Nuzhnenko) / 로이터(Reuters), CC BY 2.0

전쟁의 역사를 보면, 분쟁은 대체로 세 가지 방식으로 끝난다. 한쪽이 명확한 승리를 거두거나, 양측 모두 자원과 더 이상 희생을 감내할 의지를 소진해 협상에 나서거나, 혹은 적대행위가 조용히 멈춘 뒤 '냉랭한 평화'가 자리 잡고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분쟁이 동결되는 경우다. 중요한 점은 전쟁은 결코 느닷없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하지 못한 깊은 모순이 폭발한 결과일 뿐이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의 말처럼 전쟁은 다른, 즉 폭력적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속이다. 평화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전쟁은 정치뿐 아니라 상식과 문명 자체의 패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폭력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는 조직적인 파괴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한때 전쟁을 금지했던 국제법 질서는 침묵 속으로 밀려났고, 대중의 시야에서도 멀어졌다. 사람들은 전쟁을 스포츠 경기처럼 소비하거나, 반대로 악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며 말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사상자 수가 적다고 말하지만, 이는 단지 통계가 만들어낸 착시에 불과하다. 이번 전쟁은 세계대전이 아니라 특정 지역에서 병력을 끝없이 소모하는 전쟁일 뿐이며, 전사자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한다. 이 전쟁은 2022년이 아니라 2014년에 시작됐다. 이를 두고 많은 통찰력 있는 관찰자들은 가장 예측 가능했고,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가장 막기 쉬운 전쟁이었다고 지적했다. 이후 서방의 전직 지도자들이 초기 평화협상이 진정한 합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의 공개 충돌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인정하면서, 애초부터 평화를 실현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없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분쟁 지역 당국의 전쟁 강경 노선에는 제국 중심부의 여러 정치지도자, 특히 바이든과 트럼프도 책임이 있다. 한 정치세력이 시작한 노선은 다른 정치세력이 이어받았고, 그 흐름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가 '특별군사작전'을 시작한 이후에도 전쟁을 멈출 기회는 있었지만, 영국을 비롯한 외부 세력이 분쟁 장기화를 원하면서 평화는 가로막혔다. 러시아에 대한 강한 적대감(흔히 '러시아 혐오'라고 불리는)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 국민의 희생을 대가로 이익을 얻는 대리전을 지속하려 한 서방은 진정성 있는 평화 구상을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넓은 국토와 많은 인구,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우크라이나는 이제 전쟁이 쉽게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점점 사라지는 전장이 되었다. NATO가 사실상 공개적으로 추구하는 '마지막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우게 한다'는 전략은 새로운 단계의 확전으로 접어들고 있다. 핵전쟁의 위험은 현실적이다. 그런데도 주류 언론과 전문가들은 '전술핵' 사용이 오히려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며 그 위험을 점차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고 있다. 매파는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인물인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늘어난 듯하다. 때로는 정말 모두가 제정신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들은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특히 드론과 탄도미사일의 파괴력이 그 이유로 거론된다. 그러나 전쟁은 다시 한번 군사기술 발전의 촉매가 되고 있으며, 군산복합체에는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고 있다. 평화는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수익성이 없다. 한 비판적 연구자가 간명하게 말했듯, 전쟁이 없었다면 젤렌스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시민은 아무런 선택권도 없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전문성과 명성, 권력, 이익을 앞세워 모든 결정을 내린다. 서방과 우크라이나에서 간헐적으로 실시되는 여론조사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결과는 질문을 누가 어떻게 던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Z세대는 군복을 입고 고된 훈련을 견디며, 편안한 삶과 현대 기술에 대한 의존을 포기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전쟁이 나면 조국을 지키겠느냐는 추상적인 질문에는 상당수가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의 문제가 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젊은 세대는 군사훈련에도, 심지어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는 일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군비 경쟁과 군사적 의무를 원하지 않는 시민과, 이를 추진하는 엘리트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최근 앙카라 회의 이후 열린 한 행사에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됐다. 장기전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정작 사람들의 동의를 얻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답변은 혼란스럽고 상투적이었다. 인적 자원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회원국들은 국민을 '교육'하고 '사회적 회복력'을 키우는 데 힘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회복력'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감추기 위한 현대식 완곡어법에 불과하다. 그것은 의도적인 공포 조성, 증오의 확산, 사회 전반의 군사화, 그리고 복지와 사회적 필요에 써야 할 예산을 군사비로 돌리는 일을 뜻한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겁쟁이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배신자로 낙인찍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특별한 사례다. 전쟁에 대한 태도를 조사한 우크라이나 국내 여론조사와 국제 독립기관의 조사 결과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단순한 여론 변화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우크라이나의 여론조사 기관들은 대체로 국민의 항전 의지, 군에 대한 높은 신뢰, 타협 거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가 갖는 분명한 국내 정치적 목적과는 별개로,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군사적 해결을 지지하는 여론은 줄어드는 반면 협상을 지지하는 여론은 증가하고 있다(7월 기준 66%). 전쟁 피로감이 커지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동시에, 외국 지도부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내 여론조사는 결의와 국가 정체성을 측정하는 데 집중하는 반면, 갤럽은 '협상을 원하는가, 전투를 계속하기를 원하는가'라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정치적 함의는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국민의 항전 의지와 점점 커지는 타협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으로 광활한 들판이 공동묘지로 변하는 현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거리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징집 장면을 담은 영상을 매일 접한다. 시민들은 이른바 '대포밥 사냥꾼(cannon fodder hunters)'에 공개적이고 집단적으로 저항하고 있으며, 최근 리비우에서 벌어진 사건도 그 사례 가운데 하나다. 한편 우크라이나의 해외 동맹국들은 난민 지위를 가진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각종 혜택을 줄이며, 그들이 귀국해 복무하도록 준비시키는 방식으로 정치 지도부를 지원하고 있다.

서로 다른 서사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실제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언론은 "새로 투입된 러시아 병사는 전선에서 평균 30분밖에 버티지 못한다"(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발언이라는 주장)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심리전을 더욱 부추긴다. 러시아가 치르는 희생이 점점 자국민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대규모 강제징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군은 경제적 이유로 국가와 계약을 맺는 자원병들로 계속 충원되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군의 사상자 수와 아직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의 규모를 고려하면, 러시아 병사들이 전선에서 극히 짧은 시간만 생존한다는 보도는 과장된 선전일 가능성이 크다.

이 전쟁의 비극은 다른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과 계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래전 세르비아 속담이 말한 현실이 그대로 되풀이된다.

국가는 대포를 내고, 부자는 소를 내며, 가난한 사람은 아들을 낸다. 전쟁이 끝나면 국가는 대포를 되찾고, 부자는 소를 되찾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덤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러시아에서 싸우는 많은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이들이다. 국가가 제시하는 보수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 강제가 만들어낸 사실상의 징집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에서는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강제로 징집된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부패,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도 다시 전선에 투입되는 현실, 용기를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우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는 사례 등이 반복해서 보고되고 있다.

만약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더 큰 전쟁이 벌어진다면, 같은 구조가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사회적 회복력', '청년 교육', '국민의 희생정신'을 외치는 모든 장군과 정치인은 자신들의 요구가 전쟁의 잔혹한 계급 논리를 유럽 대륙 전체로 확장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결정의 최종적인 대가를 직접 치르지 않는다. 누가 결정을 내리고, 누가 이익을 얻으며, 누가 죽어가는가. 전쟁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계급적 현실은 결코 대중의 의식에서 지워져서는 안 된다. 

[출처] The Abstraction of War: Ukraine, Proxy Dynamics, and the Erasure of the Working Class

[번역] 이꽃맘 

덧붙이는 말

이 글은 <글로브트로터>(Globetrotter)가 제작했다. 빌랴나 반콥스카(Biljana Vankovska)는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에 있는 글로벌 변화 센터(Global Change Center) 소장이자 평화학 교수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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