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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보편화된 탓에, 사회주의 비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들조차 사회주의에 대해 심각한 오해를 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결코 한가한 한탄이 아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통념은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회적 소유는 흔히 '국가 소유(국유화)'를 대리 지표로 삼아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국유화는 사회주의의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구(舊)유고슬라비아는 생산수단이 주로 국가 소유였음에도 실업, 인플레이션, 계급·지역 간 불평등 등 자본주의의 핵심적 폐해를 그대로 노출했다(물론 그 극단성이 오늘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달성한' 수위만큼은 아니었을지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처럼 상당한 국유화 부문을 보유한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함에도 우리가 프랑스를 사회주의 국가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단순한 국유화나 사회적 소유, 그 이상의 엄밀한 무엇을 의미한다.
자본주의가 경제 주체들에게 본질적으로 강제하는 작동 방식은 바로 '경쟁'이다. 첫째는 자본가 간의 경쟁이다. 이 경쟁은 자본가에게 끊임없는 축적을 강요한다. 기술 혁신과 최신 생산공정을 도입하지 못하면 곧바로 시장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노동자 간의 경쟁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결사(combinations)', 즉 노동조합이라 부른 조직을 결성하여 이러한 적대적 경쟁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조합을 해체하거나 무력화하려 시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경제 주체 간의 '협력'을 토대로 구축된다. 생산수단이 공동으로 소유되지 않는다면, 즉 자본가 계급이 사멸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협력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노동자 간의 협력을 의미하며, 이는 본질적으로 경쟁을 배제하는 체제를 뜻한다. 앞서 언급한 유고슬라비아의 '시장 사회주의(market socialism)'는 국유기업들이 자본주의의 민간기업처럼 시장에서 유혈 경쟁을 벌이는 구조였다. 유고슬라비아가 자본주의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경쟁이 체제의 기본 원리라는 사실은 경쟁에서 패배한 주체에게 반드시 '징벌'이 가해짐을 뜻한다. 이 징벌은 해당 주체를 체제에서 '내쫓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곧 실패자들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체제의 '밖'이 존재해야 함을 전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밖'을 '산업예비군(상시적 실업군)'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이 '밖'은 체제 유지를 위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든 생산체제는 노동자에게 노동 규율과 의욕을 강제하는 메커니즘을 요구한다. 노예제나 봉건제 아래에서는 신체적 소유와 채찍이라는 직접적·물리적 강제력이 작동했다. 그러나 법적 자유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에서는 물리적 폭력을 신체에 직접 가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자본은 어떻게 노동자들에게 노동 규율을 강제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규율을 위반할 경우 가해지는 '해고', 즉 체제 밖으로 쫓겨날 것이라는 공포다.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노동자들이 내몰릴 '체제의 밖'이 굳건히 유지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밖'은 또 다른 두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목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첫째,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비해 일정 수준에서 억제되도록 함으로써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지속적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둘째, 명목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함으로써 화폐가치의 안정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안'과 '밖'이 함께 구성하는 하나의 총체로 규정해야 한다. 이 '밖'은 체계의 논리적 구성요소이며, 체계 전체를 규정하는 데 있어 '안'만큼이나 필수적인 요소다.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한 어떠한 주류 경제학 파벌도 이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다. 예컨대 오늘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경제학 사조인 왈라스(Walras) 학파는 모든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일반균형'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이는 노동시장에서도 완전고용이 이뤄져 비자발적 실업이나 산업예비군, 즉 '체제의 밖'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직 '안'만 존재한다는 이 이상주의적 모델 속에서는 대체 무엇이 노동자의 노동 규율을 보장하는지 설명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 생산 과정 자체를 제대로 규명해 내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고전파 경제학의 핵심 인물인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를 "생산 이론의 대가"라고 극찬했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전파 정치경제학조차도 노동 동기와 노동 규율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산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자본주의는 신체적 폭력 대신 '해고와 실업'이라는 사회적 매장 체제를 통해 노동을 강제한다. 반면 사회주의에는 이러한 '밖'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주의에서 사람들은 어떤 강제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해 있으며 동시에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는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자체가 곧 사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이룬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로부터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가 따라 나온다. 자본주의는 징벌적 체제이며, 또 그래야만 하는 체제다. 다시 말해 뒤처지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데 기반을 둔 체제다. 반면 협력을 본질로 하는 사회주의는 징벌적 체제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징벌성은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방식에 깊이 새겨져 있으며, 반드시 누군가의 악의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축적을 하지 못해 새로운 생산공정과 신제품을 도입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본가는 체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는 방식으로 처벌받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더 많이 축적하고 더 많은 기술혁신을 도입하는 자본가들이 차지한다. 이들은 대체로 더 규모가 큰 자본가들이며,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상을 자본의 집중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또한 자본가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한 노동자는 체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고 실업자의 대열로 내몰리는 방식으로 처벌받는다. 따라서 '밖', 즉 산업예비군은 처벌받은 사람들이 수용되는 장소인 동시에, 자본이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곧바로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첫째, '복지 자본주의', 다시 말해 국민의 전반적인 생활조건을 개선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동시에 체제의 징벌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케인스는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 그는 왈라스 학파가 개념화한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본주의를 대체로 왈라스적인 방식으로 이해했다. 즉, 자본주의를 '안'과 '밖'으로 이루어진 체제가 아니라 '안'만으로 이루어진 체제로 본 것이다. 케인스는 자본이 케인스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유를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 이해가 깊어지면 그런 반대도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의 반대는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에 기초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완전고용은 애초에 불가능할 뿐 아니라, 완전고용을 향한 어떠한 움직임도 노동에 대한 자본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특정한 상황에서는 자본이 그러한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안정시키기 위한 케인스주의 정책이 더 이상 각광받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개혁된 자본주의'나 '복지 자본주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본질적으로 징벌적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주의는 그 본성상 징벌적 체제가 아니므로 반드시 완전고용을 특징으로 해야 한다. 완전고용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든, 노동 의욕과 노동 규율을 강제하기 위해 보다 직접적인 강압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든, 사회주의가 징벌적 성격을 띠는 것은 기껏해야 사회주의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사회주의의 본질적 특징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현대사에서 완전고용을 특징으로 했던 경제가 소비에트 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뿐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곳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그 사회들에는 다시 광범위한 실업이 나타났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일탈과 왜곡이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들을 사회주의 체제의 영구적인 특징으로 떠받드는 것은 중대한 오류다.
[출처] What is Socialism?
[번역] 이꽃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