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연설. (제11회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 EEF))
지난 1일부터 4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11회 동방경제포럼
다가오는 세계적 대공황에 맞서 러시아·중국·이란이 주도하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가 필요하다
1. 오늘 나는 현재의 석유 위기가 어떻게 연쇄적인 금융 채무불이행을 일으키고, 올가을 어느 시점에 세계적인 금융 대공황으로 이어질 것인지 이야기하려 한다. 이 위기는 이번 회의의 핵심 주제인 대외무역과 국내 금융투자를 크게 뒤흔들 것이다.
문제는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이들과 인접한 아시아 국가들의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어떤 새로운 무역·금융 체제를 마련해야 할 것인가?
여러분도 모두 알고 있듯이 미국이 페르시아만의 석유 수출을 봉쇄하면서 전 세계 석유·비료·식량 교역의 25%가 차질을 빚고 있다. 이들 상품 가격은 급등할 것이며, 석유에 의존하는 많은 산업은 새롭게 치솟은 유가로는 수익을 낼 수 없어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정부가 전기요금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국민이 집에 난방과 조명을 유지할 수 있고, 기업도 영업을 계속할 수 있다.
많은 국가는 수입하는 석유와 비료, 식량 가격이 오르는 상황에서 만기가 돌아오는 대외부채까지 함께 갚을 여력이 없다. 이 부채의 대부분은 달러로 표시돼 있다.
아시아와 글로벌 사우스의 많은 국가는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예정된 대외채무 원리금까지 갚아야 한다면, 산업계와 국민이 비싸진 석유를 감당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지급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한다. 각국은 달러 표시 부채를 갚을 것인지, 아니면 자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과 연료를 사고 국민이 위기를 견딜 수 있도록 사회적 지원을 제공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2. 이번 위기는 기존의 미국 달러 중심 세계 통화질서와 IMF의 역할을 끝내는 정치적 촉매제가 될 것이다. 이번 위기를 견뎌낼 주요 국가인 러시아와 중국 정부가 자연스럽게 새로운 질서를 이끌게 될 것이다.
이는 1980년대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당시 멕시코가 1982년 채권을 채무불이행한 뒤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채무불이행이 확산했다. 브래디 채무감면(1989년 미국 재무장관 니콜라스 브래디(Nicholas Brady)가 라틴아메리카 등 개발도상국의 외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외채 탕감 및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민간 채권자들이 최대한 회수할 수 있는 몫을 지키기 위해 직접 마련했다.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외국 자본의 기업 인수로 이어졌고, 각국은 IMF의 대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IMF는 돈을 빌린 나라들에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적으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국제 채권자들이 많은 아시아 자산을 사들이면서 대규모 자산 이전이 일어났고, 이들은 러시아에도 더 많은 자산을 매각하라고 압박했다.
3. 그렇다면 이번에는 금융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세계는 흑자국과 적자국 사이의 통화 및 국제수지 관계에 새로운 규칙을 마련해야 한다. 부채에 시달리는 국가들이 만성적인 긴축과 불황을 떠안도록 강요하지 않는 방식이어야 한다. 가장 큰 과제는 정부가 새로운 신용을 공급하되, 자산과 경제적 통제권이 채권국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미 누적된 달러 표시 부채를 탕감하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일대일로 참여국을 포함한 무역·투자 파트너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려 한다면, 이 지원금이 외국 채권자들에게 흘러가 기존의 막대한 부채를 갚는 데 쓰이게 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동안 이런 부채는 오늘날 국제무역과 금융 불안정의 근원인 미국의 ‘석유 전쟁(’으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성장을 가로막아 왔다.
이는 단순히 세계경제에서 달러 의존을 줄이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1945년 미국 외교관들이 만들어낸 채권자 우선 규칙을 대신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각국이 석유 위기에서 살아남으려면 새로운 부채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러시아와 중국이 아시아 및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 국제수지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려면, 새로운 국제 신용체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체제는 중국과 러시아처럼 무역흑자를 내고 해외에 투자하는 국가들이 공정한 상호 이익을 얻도록 하면서도, 미국의 달러 중심 질서가 그랬던 것처럼 무역 상대국과 채무국을 부채 의존 상태로 몰아넣지 않아야 한다.
4.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1944년 영국 재무부를 대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미국 측 협상단이 전후 경제질서, 특히 채권국과 채무국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 것인가를 놓고 벌인 논쟁의 핵심이었다.
영국은 미국이 무역흑자를 내는 반면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적자를 보게 될 것을 우려했다.
영국은 자국 제국과 제국특혜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잃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제도는 인도와 옛 식민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축적한 통화 준비금을 영국에서 쓰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한 자유무역 질서 아래에서는 이 저축의 상당 부분을 미국 상품을 수입하는 데 쓰거나 미국에 투자하게 됐다.
케인스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 미국이 영국과 유럽 나머지 국가들에 대한 채권을 계속 쌓아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영국 재무부를 대표해, 각국 중앙은행이 법정 초국가 통화인 방코르(bancor)를 회계 단위로 사용해 신용과 부채를 상계할 수 있도록 자체적인 초국가적 회계체계를 운영하는 국제기구를 제안했다. 이러한 법정 신용의 기본 원리는 훗날 IMF가 만든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 SDR)과 상당히 비슷했다. 그러나 케인스의 구상은 채무국에 단순히 돈을 빌려줘 채권자에게 갚게 하고, 그 대가로 자국 환율을 떠받치기 위해 스스로 경제를 파괴하는 긴축정책을 시행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케인스는 채권국이 채무국에 대해 보유한 금융채권을 감면하는 방식으로 조정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채무국이 애초에 그 돈을 갚을 필요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채무감면을 시행하면 채권국이 공식 저축의 형태로 축적해 온 채권을 소멸시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채권은, 경제를 파괴할 정도의 긴축정책을 시행하고 공공자산을 채권국 투자자들에게 매각해 민영화하지 않고서는 빚을 갚을 수 없는 고부채 회원국들에 대한 채권을 뜻한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채무국들은 성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공공지출과 신용공급을 중단할 수밖에 없고, 결국 성장의 과실은 채권국에 집중된다. 반면 채권국으로 유입되는 막대한 자금은 금융 거품을 부풀렸다가 붕괴시키는 데 쓰일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
이러한 구상은 투자를 통해 상호 이익을 확대하기는커녕 국제경제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새로운 부채가 쌓이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미국이 지지한 IMF 체제는 채무국이 단순히 정부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노동자와 산업계에 세금을 더 부과해 국내 가격을 크게 낮추도록 요구했다. 그렇게 국내시장을 고사시키면 국내 생산물이 수출용으로 ‘풀려나’ 외화를 벌 수 있고, 그 외화로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마치 모든 생산물과 생산능력이 서로 아무런 차이 없이 대체 가능한 것처럼 전제한 것이다.
민간부문 채권자들은 중요한 문제를 외면한다. 긴축이 생산성과 공공 인프라 개발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데 필요한 생활수준 향상과 교육·보건 투자를 어떻게 훼손하는지 인정하지 않는다. 긴축은 채무국이 부채를 갚을 수 있게 한다는 명분상의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긴축정책은 오히려 채무국을 더 깊은 부채 속으로 몰아넣으며, 이렇게 늘어난 부채는 결국 그 나라의 무역 의존을 유지하는 자금으로 쓰인다.
그리고 채권국들은 이러한 무역·부채 의존을 지렛대로 활용해 채무국이 공공자산을 자신들에게 매각하도록 강요해 왔다. 그 결과 1945년 이후 엄청난 규모의 자산 약탈이 벌어졌고,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을 따라잡도록’ 돕기는커녕 국제 경제의 양극화만 심화했다.
미국은 이미 세계 통화용 금 보유량의 75%를 보유하고 있었고, 1950~1951년 한국전쟁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 비중을 80%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미국을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로 몰아넣었고, 결국 미국은 1971년 금 태환을 중단했다.
그 뒤 미국은 달러를 찍어내고 다른 나라들에게 그 달러로 미국 국채와 증권을 사라고 요구해 왔다. 이렇게 달러를 다시 미국으로 환류시키는 구조는 미국의 냉전 군사비 지출을 떠받쳤으며, 1980년대 이후 탈산업화로 발생한 무역적자도 충당했다. 미국 경제는 이 시기부터 공공 인프라와 화폐·신용 창출의 배분을 민영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주로 중국·러시아·이란이 자금을 공급할 새로운 경제질서는 어떤 도덕적 원칙에 기초해야 하는가?
상호부조다. 이를 실현하려면 채권국들이 자금을 지원하는 국가의 경제에서 지분을 보유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일대일로 같은 사업을 통해 공공 인프라에 자금을 대고, 그 대가로 해당 경제에 지분을 갖는 방식이다. 핵심은 과거의 무역·부채 의존에서 생겨난 기존 부채를 갚도록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목적을 위해 대출을 제공하는 데 있다. 이러한 무역·부채 의존은 1945년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 금융질서를 특징지어 왔다.
요약하면, 지난 한 세기 동안 국제 통화·금융 관계를 지배해 온 채권자 우선 원칙은 달러 중심에서 벗어난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것이다. 이 새로운 체제에서는 채권자가 대외채무 상환을 국내 성장 목표보다 더 우선하라고 강요하지 못하도록 채무국의 이해관계를 보호해야 한다.
어떤 나라들이 가장 취약한가? 석유 의존도가 높고 식량이 부족한 나라들이다. 특히 아시아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그렇다.
이들은 러시아와 중국의 신용에 의존해야 하며, 중국이 보증하는 형태로 이란에 대한 채무를 떠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체제에서 전통적인 부채 예속 대신 인프라 사업에 지분 참여 방식으로 투자하려는 나라는 사실상 이들 국가뿐이다.
생산적 상호 이익을 위한 지원 체제가 중국과 러시아에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러한 전망은 현실성이 있다.
이 체제는 중국과 러시아 및 그 무역 상대국들을 서방으로부터 분리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들 국가는 미국의 전쟁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할 필요도 줄일 수 있다. 또한 미국이 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남겨둔 수단, 즉 혼란을 만들어내는 능력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 예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해방의 날’ 관세와 러시아·베네수엘라·이란을 공격해 세계 석유무역의 병목지점을 만들려는 전쟁을 들 수 있다.
[출처] Keynes’s Unfinished Monetary Revolutio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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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허드슨(Michael Hudson)은 월스트리트 금융 분석가, 캔자스시티 미주리대학교 경제학 석좌 연구 교수, 장기경제동향연구소(ISLET) 대표다. 주요 저서로 ⟪미국 제국의 경제 전략⟫, ⟪그리고 그들의 빚을 용서하라⟫, ⟪호스트 죽이기⟫, ⟪버블과 그 이후⟫ 등이 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