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덜어낸 20조 원, 반도체와 원전 옆에 놓였다

[제9호] 2026년 8월 21일(금)

 
참세상
데일리 큐레이션
DAILY CURATION
2026/08/21(금)
어제 16시 — 오늘 16시의 세계

거듭되는 사건 사고들. 쏟아지는 온갖 보도와 입장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 거지? 답답했던 이들을 위한 참세상의 신규 콘텐츠, ‘데일리 큐레이션’을 시작합니다. 어제 오후 4시부터 오늘 오후 4시까지, 국내외 여러 매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떠도는 세상의 소식을 민중의 관점으로 고르고 톺아봐 매일 저녁 전합니다. 다른 세계를 향해 고민하고 투쟁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콘텐츠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의견 부탁드립니다.

01
오늘의 다섯 줄
1 학교에서 덜어낸 20조 원이 105조 기금으로 들어가는데, 그 기금의 투자 목록에는 반도체와 원전이 있고 초 · 중 · 고의 몫은 없다.
2 평택에서 스물여덟 살 하청노동자를 죽게 한 빠진 절차 하나를, HL만도는 미국 공장에서 이미 두 번 지적받고도 고치지 않았다.
3 현대차 노동자 3만9천 명이 10년 만에 하루 종일 공장을 세웠다. 같은 날 양재동 본사 앞에 선 부품사 노동자들에게 원청은 아직 한 번도 교섭 상대로 답한 적이 없다.
4 트럼프는 북의 핵무기를 ‘57개’라고 세면서 비핵화라는 말은 삼켰고, 그 뒤를 이은 사설들은 한반도 사람들의 안전보다 협상 테이블의 빈 의자를 먼저 걱정했다.
5 구금한 팔레스타인인의 이마에 번호를 쓴다는 보도에 한 예술가는 ‘업데이트’ 한 단어로 답했고, 그 한 단어를 오늘의 말에 옮겼다.
02
오늘의 심층 분석
학교에서 덜어낸 20조 원, 100조 기금 안에서 반도체와 원전 옆에 놓였다
오늘 무엇이 바뀌었나

정부가 21일 제1차 재정운용전략협의회에서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내국세 연동을 없애기로 확정했다. 1972년부터 54년 동안 교부금은 내국세가 걷히는 만큼 자동으로 정해졌고, 2020년부터 그 비율은 20.79%였다. 내년부터는 전년도 교부금에 물가를 포함한 3년 평균 성장률을 더하고 학생이 준 만큼은 35%만 덜어내는 산식으로 바뀐다. 새 산식으로 계산한 내년 교부금은 78조9천억 원이다. 세수가 크게 는 올해 기준 현행대로라면 100조 원에 가까웠으니, 약 20조 원이 학교 밖으로 나간다. 그 돈은 새로 만드는 미래대응기금의 교육 · 인재계정으로 들어가 영유아 · 고등 · 평생교육에 쓰인다.

정부는 왜 줄지 않는다고 말하나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이날 “결코 교육재정을 줄이기 위한 개편이 아니다”라며 교부금이 전년보다 줄면 차액을 보전하는 조항을 법에 넣겠다고 했다. 한 달 전인 7월 21일 같은 장관의 말은 “내국세 연동은 유지한다”였다. 교육감협의회는 보전 장치가 “전년도 명목 총액을 유지하는 수준”이라고 답했다. 물가와 인건비가 오르는데 총액만 지키면 학교가 실제로 쓸 수 있는 돈은 해마다 줄어든다.

줄어드는 돈은 누구의 몫이었나

교부금이 이미 줄었던 2024년, 17개 교육청의 교수학습활동비는 한 해 전보다 3,006억 원, 10.2%가 깎였다. 급식실 교육공무직 인건비는 2년 사이 18% 올랐는데 새 산식대로면 교부금 증가율은 연 2.9%로 반 토막 난다. 학생 수는 줄어도 특수교육 대상은 10년 전보다 41% 늘었다. 363개 단체가 모인 긴급행동이 이날 내국세 연동을 “교육재정의 방파제”라고 부른 까닭이다.

그 돈이 들어가는 기금은 어떤 그릇인가

미래대응기금은 반도체 호황이 낳은 초과세수 25조 원과 앞으로의 추가 세수 60조 원에 교부금에서 덜어낸 20조 원을 합쳐 105조 원 규모로 만든다. 투자 분야는 청년, 성장동력, 지방, 교육 · 인재 넷인데 성장동력 계정의 대상은 프론티어급 AI와 3대 메가프로젝트 기반시설, 소형모듈원자로, 우주항공, 양자다. 학교에서 나온 돈이 같은 기금 안에서 반도체 단지와 데이터센터, 원전 옆에 놓인다. 국가재정법은 초과세수로 나랏빚부터 갚으라고 정해 두었는데 정부는 그 돈으로 기금을 쌓는다. 기금은 본예산과 달리 운용 계획을 정부가 넓게 바꿀 수 있어 국회의 통제가 느슨하고, 첨단전략산업기금 · 모태펀드와 대상이 겹친다는 지적도 나왔다. 교육부가 끝까지 요구한 초 · 중등 몫 명시는 빠졌고, 기금이 초 · 중등에 써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나 최소 비율은 없다.

앞으로 무엇을 보나

첫째, 9월 3일 예산안과 함께 국회로 가는 기금법 · 교부금법 심사다. 둘째, 기금 안의 초 · 중등 몫과 성장동력 계정의 비중이 법률에 어떻게 적히는지다. 셋째, 긴급행동이 요구한 교육 주체 참여 공론화 기구의 성사 여부다. 자동 연결이 사라진 뒤 교육 예산은 해마다 재정 당국과, 그리고 기금 안의 다른 계정과 다퉈야 하는 몫이 된다.

#교육교부금 #내국세연동제 #미래대응기금 #초과세수 #메가프로젝트 #교육공무직 #교육감협의회
 
미국에서 두 번 걸린 잠금장치 위반, 평택에서는 사람이 죽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HL만도 평택공장 하청노동자 김승모 씨는 7월 22일 낮 기계 안을 점검하다 설비가 움직여 끼였고 두 시간 뒤 숨졌다. 스물여덟 살, 입사 1년이 안 된 노동자가 혼자 일했다. 문이 열리면 기계가 서는 인터록은 풀려 있었고, 정비 중 전원을 잠그고 표지를 붙이는 절차인 잠금 · 표지(LOTO)는 없었다. 참세상이 20일 미국 산업안전보건청 기록을 확인한 결과 HL만도는 미국에서 같은 절차를 두 번 지적받았다. 2017년 앨라배마 오펠라이카 공장에서 7,600달러, 2021년 같은 공장에서 같은 조항을 다시 어겨 ‘반복 위반’으로 2만8,431달러의 과징금을 물었다. 2023년 5월에는 조지아 호건스빌 공장에서 62세 노동자가 성형기 정비 중 램에 눌려 숨졌다.

회사는 무엇을 알고 있었나

두 나라 세 공장에서 아홉 해 동안 세 번. 모두 정비 중에는 멈춰 있어야 할 기계가 움직였다. 참세상 보도에 따르면 회사는 2024년 6월 전사 안전보건정책을 만들었고 ESG 평가 사회 부문 A+를 3년째 받았다. 문서와 등급은 있었고, 기계를 세우는 절차는 평택에 없었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19일 국회에서 대표이사를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입건했다고 밝히며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작업을 모른 채 기계를 돌리는 “구조적 문제”라고 말했다. 사망 28일 만의 입건이었다.

입건 다음 날 회사는 무엇을 했나

대책위에 따르면 회사는 20일 ‘작업중지 관련 근로자 의견 서명부’에 직원 서명을 받아 평택지청에 작업중지 해제를 신청했고, 지청은 21일 오전 해제심의위원회를 열었다. 노동조합은 빠진 채였다. 대책위는 20일 유족 · 법률대리인 · 만도지부로 협상팀을 꾸려 정몽원 HL그룹 회장에게 직접 협상을 요구했다. 노동부가 18일부터 벌이는 감독도 노조에는 알리지 않은 채였다. 유족은 장례를 미룬 채 한 달을 넘겼고, 21일 오후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앞으로 무엇을 보나

첫째, 작업중지 해제 여부와 조건이다. 노조 참여 없는 해제는 같은 라인이 같은 방식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뜻이다. 둘째, 하청노동자를 원청이 자기 설비 안에서 직접 부렸는지를 따지는 불법파견 수사다. 셋째, 미국 기록의 쓰임이다. 반복 위반 이력은 경영책임자가 위험을 알았는지를 가리는 근거가 된다. 미국에서는 두 번 합쳐 3만6천 달러의 과징금이었다. 평택에서 같은 위반의 값은 이제 수사와 법정이 정한다.

#HL만도 #김승모 #중대재해처벌법 #잠금표지 #LOTO #위험의외주화 #작업중지해제
03
한 장의 세계
한 장의 세계
자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텔레그램 채널, 2026.08.20 16:14 게시 · 원문 보기 →
스무 번째 생일 풍선 아래, 시설 밖에서 보낸 스무 해

20일 오후 노들장애인야학 강당에서 김선심 씨의 탈시설 20주년 행사 ‘스물, 꽃님’이 열렸다. 행사 제목 옆에는 “기쁜 일보다 슬픈 일이 더 많아. 그래도 나와서 사는 게 행복”이라는 말이 붙었다. 전장연이 시청역 농성을 정리한 다음 날이었고,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를 담은 서울시의회 조례 개정안 표결은 25일이다. 탈시설이라는 정책 용어의 실물은 한 사람의 스무 번째 생일이다.

04
온라인 광장
오늘의 현장
원하청이 같은 날 공장을 세웠다

현대차지부가 10년 만에 전면파업에 들어가기 전날 밤, 이 발신은 파업을 ‘원하청 노동자 공동파업’이라고 불렀다. 21일 양재동 본사 앞 공동파업대회에는 부품사 노동자들이 함께 섰고, 같은 시각 화섬식품노조는 3년 법정투쟁 끝에 “불면증이 생길 정도로 힘들었다”는 지회장의 말을 전했다.

오늘의 논쟁
“대체 불가 인재강국”과 “재정 수탈” 사이

교육부 장관은 발표 직후 X에 개편을 “대체 불가 인재강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썼다. 그 한 시간 뒤 정부서울청사 앞 규탄 기자회견장에는 ‘폐지 확정’ 속보가 날아들었고, 교육감협의회와 교육단체들은 이 개편을 “재정 수탈”이라 불렀다. 반대편에서는 “학령인구 반토막인데 그대로였던 교부금 룰”이 드디어 재설계됐다는 환영이 나왔다. 논쟁의 축은 학생 수가 준 만큼 돈도 줄어야 하는가다. 한쪽은 머릿수를 세고, 다른 쪽은 급식실과 특수교육과 학습활동비를 센다. 장관의 글은 인재강국을 말하지만 기금 안의 초 · 중등 몫이 왜 빠졌는지는 답하지 않는다.

내 얼굴과 목소리가 동의 없이 학습 데이터가 되는 법

국회가 20일 개인정보 원본을 동의 없이 인공지능 개발에 쓸 수 있게 하는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이날 이를 “안전한 AI 개발을 위한 특례 신설”이라고 홍보했고, 시민사회는 “AI 예외주의 입법의 신호탄이 돼선 안 된다”고 받았다. 쟁점은 가명처리다. 지금까지는 얼굴 · 음성 같은 정보를 연구에 쓰려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가공해야 했는데, 개정안은 그 단계를 건너뛸 수 있는 특례를 만들었다. 정보 주체는 자기 정보가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단체들의 성명은 아래 오늘의 주장에서 이어진다.

오늘의 단어
교섭창구 단일화

한 사업장에 노조가 여럿이면 교섭 창구를 하나로 묶어 사용자와 마주 앉게 하는 제도다. 2011년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도입됐다. 문제는 원청이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면 원청은 “우리 사업장의 창구 단일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답한다. 중앙노동위원회는 20일 현대모비스 원청교섭 조정 신청에 조정 자체를 열지 않겠다는 ‘조정 미개시’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노조법 2조 개정으로 원청의 사용자 책임은 넓어졌지만, 누가 어떤 절차로 교섭을 시작하는지를 정하는 이 제도는 그대로다. 금속노조가 21일 이 제도의 폐기를 요구했다. 법이 넓힌 권리를 절차가 다시 좁히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말
주목팔에 쓰이던 번호가 이마로 올라왔다

하레츠가 이번 주 이스라엘군이 서안 북부 작전을 넓히며 구금한 팔레스타인인의 몸에 번호를 써넣는다고 보도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동반자이자 예술가인 니카 두브롭스키는 이 기사를 한 문장으로 받았다. “업데이트 버전: 이제 번호는 사람들의 팔이 아니라 이마에 직접 쓰인다.” 그가 덧붙인 말은 ‘업데이트’ 한 단어다. 그 한 단어는 이번 주에 나온 다른 인정과 나란히 놓일 때 더 무거워진다. 이스라엘은 2년 반 전 다섯 살 힌드 라자브와 구급대원들을 쏜 것이 자국군이었다고 이번 주 처음 인정했다.

05
오늘의 주장

1.  국회가 개인정보를 동의 없이 인공지능 개발에 쓸 길을 열고, 자동차 업종 노동자들이 이틀째 공동파업에 나선 하루, 단체들의 성명은 국회와 원청, 그리고 정부의 기금을 향했다.

2.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이 20일 국회를 통과하자 정보인권 단체들이 먼저 움직였다. 참여연대“헌법상 기본권 침해하는 개인정보 원본활용 개인정보보호법 국회 통과 규탄한다”에서 개정안이 “얼굴, 음성, 부호 등을 가명처리조차 하지 않고 정보주체의 동의 없이” 쓸 수 있는 특례를 만들었다며 “정보주체는 자신의 개인정보가 제공되는지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고 짚었다. 같은 문안의 성명은 ‘인공지능 책임성과 공공성 강화를 위한 시민사회 공동행동’ 이름으로 한국여성단체연합한국여성민우회의 홈페이지에도 같은 제목으로 실렸다. 정의당은 21일 “국민 정보인권 걷어차는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안 즉각 철회하라”며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입법을 다시 논의하라고 요구했다. 여성단체가 정보인권 성명에 이름을 올린 것은 얼굴과 음성이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수집되는 쪽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3.  공동파업 이틀째, 원청과의 교섭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 금속노조는 21일 “모비스 원청교섭 중노위 조정 미개시 결정, 창구단일화 폐기하라”에서 중앙노동위원회가 전날 조정을 열지 않기로 한 결정을 두고 “원청은 그저 절차를 무시하고 뻗대는 것만으로 완벽한 면죄부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파업 전날인 19일 민주노총“불평등 노동시장 바꾸는 사회적 투쟁, 자동차업종 노동자의 공동파업을 지지한다”에서 “자본이 오랫동안 갈라놓으려 했던 노동자들이 하나의 산별노조 안에서 공동의 목소리를 낸다”고 썼다. 부품 업종의 금속노조 충남지부는 20일 하나머티리얼즈 규탄 기자회견에서 “반도체는 슈퍼사이클, 임원들은 성과금 잔치, 노동자는 근로기준법 미달”이라고 했다. 평택의 만도 김승모 중대재해 대책위는 회사의 “기습적 작업중지 해제 신청”을 규탄했고, 그 경과는 위 심층 분석에 담았다. 창구 단일화와 납품 단가, 작업중지 해제까지 사안은 다르지만 원청이 절차 뒤에서 책임을 미루는 방식은 같다.

4.  한편 전력과 인사, 예산을 두고도 서로 다른 목소리가 정부를 향했다. 환경운동연합이 함께하는 신규핵발전소저지와핵없는사회를위한전국행동은 20일 “급조된 메가 전력수요, 핵발전 확대의 명분이 될 수 없다”에서 “수요를 부풀리고, 부족을 만들고, 그 부족을 핵발전으로 채우겠다는 방식은 핵산업계의 이익만 반영할 뿐”이라고 했고, 이튿날 송전탑 건설 반대 전국행동은 “해남에서 서울까지 한 달을 걸어온 국민을 외면한 이재명 대통령을 규탄한다”는 기자회견문을 냈다. 민주노총은 21일 “인요한은 적십자사 회장 자격 없다”며 “공공의료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이유로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제한 의결을 요구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이날 오후 한국재정정보원 앞에서 장애인평생교육법 예산을 외면한 기획예산처 규탄 결의대회를 열었다. 교부금에서 덜어낸 20조 원이 평생교육에 쓰인다는 날, 장애인평생교육 예산은 “예산 없는 권리, 차별은 그대로”라는 펼침막 앞에 있었다. 정의당사회연대경제기본법 국회 통과를 환영하며 “이윤과 경쟁만을 좇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를 넘어” 호혜의 가치가 제도에 들어왔다고 평했다.

06
사설 · 칼럼 비평
주목위선이 걷힌 시대가 더 솔직하다는 말의 무게
「1990년대의 시대정신과 오늘날의 불안」  브랑코 밀라노비치 참세상 · 08/21

밀라노비치는 1990년대의 세계시민주의를 순진한 낙관으로 보지 않는다. 서구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가리던 “이념적 외피”였다고 쓴다. 가난한 나라의 성장은 부유한 나라의 지위를 흔들지 않는 한에서만 환영받았고, 중국이 그 선을 넘자 규칙에 기반한 질서라는 말도 함께 낡았다. 그래서 트럼프의 노골적 이익 정치는 새로운 타락이라기보다 위선이 끝났다는 뒤늦은 고백이다. 글이 말하는 “더 거칠지만 더 솔직한 시대”의 솔직함은 관세와 영토를 공개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된 강자의 솔직함이다. 그 자리에서 빈손으로 서 있는 쪽의 처지는 위선의 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비판전력 전망이 넉 달 만에 원전 19기만큼 늘어난 이유는 묻지 않는다

정부가 2040년 최대 전력수요를 넉 달 전 잠정안보다 2,680만kW 올려 잡았다는 숫자에서 사설은 “전력 확보의 다급한 현실”을 읽는다. 같은 숫자를 두고 시민사회는 수요를 부풀려 부족을 만드는 방식이라고 읽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그 수요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면 된다. 증가분 2,680만kW 가운데 2,060만kW가 반도체 클러스터, 790만kW가 데이터센터다. 기업의 투자 계획서가 그대로 국가 전력 전망이 됐다. 사설은 재생에너지가 그 수요의 58%밖에 감당하지 못한다며 원전을 “현실적 대안”이라 부르는데, 전망치를 검증하지 않은 채 공급만 묻는 순서가 이 사설의 논리다. 한 달을 걸어 서울에 온 해남 주민들이 따진 것도 송전망 이전에 그 수요의 출처였다.

비판지켜야 할 것이 ‘거래 대상이 아닌 무기’뿐인 안보론

이 사설이 최악이라 부르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대화다. 트럼프의 ‘57개’ 발언과 비핵화 회피를 문제 삼는 데까지는 한겨레와 다르지 않지만, 결론에서 “주한미군과 확장 억제, 한미 연합방위태세만큼은 결코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는 순간 사설이 지키려는 것은 한반도 사람들의 안전에서 무기 배치의 현상 유지로 옮겨 간다. 미군 훈련 축소에 “경의를 표한다”고 한 이재명 대통령의 말을 김여정 담화와 나란히 놓아 조롱의 효과를 빌리는 배치도 논증을 대신한다. 북미가 핵 동결과 군비 통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왜 한국에 최악인지, 사설은 구경꾼이 된다는 감정 말고는 설명하지 않는다.

논쟁동결을 받아들인 현실론은 어디까지 가나

한겨레는 ‘우선 동결’이라는 정부의 1차 목표를 받아들이면서 ‘핵 없는 한반도’ 원칙은 놓지 말라고 쓴다. 동결과 비핵화 사이의 이 자리는 현실론으로는 온당하다. 평화운동이 오래 물어 온 질문은 다른 데 있다. 훈련을 줄이고 핵을 동결하는 합의가 적대 정책의 종식과 군축으로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다음 위기까지의 시간벌기로 끝날 것인지다. 사설이 요구하는 “모든 외교 역량”이 대화판에 끼어드는 일에만 쓰인다면 원칙은 구호로 남는다. 동결 다음 순서로 평화협정과 제재 해제를 누가 먼저 입에 올리느냐에서 이 논쟁은 갈린다.

주목삭제에서 무력화로, 정부가 한 발 앞서기 시작한 지점

삭제는 늘 한 발 늦었다. 차단된 사이트가 도메인만 바꿔 되살아나는 구조에서 영상 하나를 지우는 사이 다른 주소가 열렸고, 사설은 그 지각을 감추지 않는다. 경향이 짚은 변화는 정부 대응의 단위가 ‘영상 삭제’에서 ‘사이트 무력화’로 옮겨 갔다는 점이다. 유통 생태계를 겨누는 방향은 옳다. 다만 그 생태계를 떠받쳐 온 결제망과 플랫폼의 책임까지 법이 따라갈 때라야 피해자가 직접 삭제를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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