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을 쟁취하고 영국을 물리친 뒤에도 미국의 새로운 경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캐나다를 둘러싸고 영국과 전쟁이 간헐적으로 계속됐으며, 1812년에는 영국군이 워싱턴 D.C.를 침공해 도시를 불태우는 사태도 벌어졌다.

이 시기 무역은 크게 출렁였다. 독립혁명 뒤 국내총생산의 20%를 넘을 정도로 늘었다가, 이어진 영국과의 전쟁 동안 급락했다. 그러나 그 뒤 미국 경제는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무역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게 유지된 것은 국내 생산이 급증했고, 특히 농업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었다.

초기 미국 대통령들은 원주민을 서쪽으로 계속 몰아내는 대가로 서부와 남부의 개척을 적극 장려했다. 미국은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이어 1830년 제정된 인디언 이주법에 따라 원주민들은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른바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 불리는 비극 속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거나 삶의 터전을 잃었다.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이른바 '먼로 독트린'을 천명하며, 서반구는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으며 옛 유럽 식민 열강의 개입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846년 미국은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체결해 서부 정착을 확대했으며, 나아가 멕시코가 지배하던 텍사스를 둘러싸고 전쟁을 일으켰다. 그 결과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서부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요 산업국이자 무역국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한 가지 중요한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남부 주들의 노예제였다. 남부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려 하자 북부는 거의 5년에 걸친 길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결국 산업화된 북부가 훨씬 더 많은 자유노동 인구를 바탕으로 승리했고, 이는 생산의 대폭적인 확대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남북전쟁은 정치 권력도 북부의 공화당으로 넘어가게 했다. 공화당은 재정 수입을 늘리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도입했다. 미국 경제는 제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더욱 다각화됐고, 수입 공산품에 대한 의존도도 크게 낮아졌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이미 GDP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되어 있었다.

남북전쟁 이후 시작된 철도 건설 붐은 국내 생산과 무역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 정점은 1869년 동부와 서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의 완공이었다.

1900년에 이르러 미국의 1인당 소득은 당시 세계 패권국이었지만 쇠퇴기에 접어든 영국을 추월했다. 독립 이후 불과 한 세기 만에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옛 지배국이었던 영국을 앞지른 것이다.

1850년대부터 미국은 태평양에서 해외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했다. 이를 계기로 아시아와의 교역이 가능해졌고, 미국 지배층은 광대한 태평양을 장악하려는 구상을 본격적으로 품기 시작했다.
새로운 제국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였다. 상품 가격이 급등하는 호황기가 찾아오면 기업가들은 태평양의 섬들로 몰려가 농장과 플랜테이션을 세우거나 광산 채굴권을 확보했다. 미국은 1850~1860년대 미드웨이섬을 시작으로 여러 섬을 차례로 병합했다. 1870년대에는 미국인들이 사실상 하와이 정부를 좌우하며 병합을 추진했고, 1880년대에는 미국 정부가 영국과 독일 정부와 협력해 사모아를 직접 통치하며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처럼 행동했다.
19세기 말은 미국이 대륙 국가에서 세계적 강국으로 전환한 시기였으며, 그 전환점은 1898년의 미국·스페인 전쟁이었다. 미국은 1898년 2월 전함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한 사건을 구실로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고, 곧 쿠바를 장악했다. 이어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으며, 독립국이던 하와이 공화국도 미국에 병합됐다.
미국 제국은 건설 초기부터 인종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다. 지배층 일부는 태평양 제국 건설이 "아시아의 야만인 무리를 우리 사회 안으로 끌어들여 우리의 정치 체제를 오염시키고 약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다른 이들은 선교사적 접근을 주장했다. 그들은 필리핀인들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전혀 없는 아이들"이므로 미국의 지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필리핀 지배는 "현재 혼란이 지배하는 곳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신성한 사명"으로 정당화됐다. 제국주의자들은 필리핀 국민에게 자치 능력이 없다고 보았으며, 그들이 "앵글로색슨식 자유가 무엇인지 깨닫기까지는 50년에서 100년의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내내 미국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 과정이 꾸준하고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본주의 축적의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경기순환이 계속됐고, 그 결과 1883년부터 1897년까지 장기 불황이 이어졌다. (아래 그래프에서도 1880년대 성장세가 정체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880년만 해도 미국 노동자의 거의 절반은 여전히 농업에 종사했고, 제조업 노동자는 약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후 40년 동안 이 비율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미국은 세계 최대의 제조업 강국이자 국제 금융의 중심지가 됐다. 미국 노동계급도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했다. 그러나 실업하거나 저임금에 시달릴 때 더 이상 서부로 떠나 새 삶을 찾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되면서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도시에서는 계급투쟁이 한층 격화됐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상당 부분이 약화되고 파괴되면서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위치를 확고히 차지했다. 1945년 미국은 제조업, 금융, 군사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으며, 군사력에서는 소련만이 미국에 맞설 수 있었다. 미국은 자국에서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를 통해 전후 국제질서를 주도했고, 그 과정에서 국제연합(UN), 세계은행(World Bank), 국제통화기금(IMF) 등 전후 국제기구의 틀을 마련했다. 이로써 세계는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는 미국이 규정한 조건 아래에서만 유지되는 세계 평화였다. 미국은 소련을 상대로 냉전을 계속했고, 남아메리카는 물론 중동과 아시아에서도 좌파 정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개입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이 보여주었듯 이러한 개입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베트남전의 굴욕적인 패배는 미국 경제력이 구조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먼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유럽 산업이 부흥했고, 이어 1970년대에는 일본이 눈부신 산업 부흥을 이루며 미국의 지위를 위협했다. 미국 제조업이 쇠퇴하고 더 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이전하면서 달러는 세계 시장에서 누리던 거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잃기 시작했고, 1971년에는 평가절하됐다. 베트남전의 후유증으로 미국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연방정부도 재정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자본의 수익성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미국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렸다.

1990년대 초 소련이 붕괴하자 미국 제국주의는 영원히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른바 '역사의 종언'이라는 주장도 등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미국 쇠퇴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미국은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새로운 경제적 경쟁자, 중국과 마주하게 됐다.
이 연재의 3부에서는 미국의 세계 제국을 위협하는 오늘날의 요인을 살펴볼 것이다. 그 위협은 첫째, 미국 국내 경제의 구조적 약화에서 비롯됐고, 둘째, 외부에서 부상한 경쟁국들의 도전으로 더욱 커졌다. 이는 서기 2세기 이후 내부의 약화와 외부의 도전에 직면하며 쇠퇴의 길을 걸었던 고대 로마제국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출처] 250 YEARS: The United States – from independence to empire (part two)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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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로버츠(Michael Roberts)는 런던 시에서 40년 넘게 마르크스 경제학자로 일하며, 세계 자본주의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