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K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
이러한 말과 함께, 하나의 시대 전환에 해당하는 무게를 지닌 최종 성명을 통해 쿠르디스탄노동자당(PKK)은 월요일(5월 12일) 그 조직 구조의 해산과 무장 투쟁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튀르키예 국가와의 40년 넘는 갈등을 거친 끝에, 압둘라 오잘란(Abdullah Öcalan)이 창립한 이 정당은 하나의 시대를 마감했고, 이제부터는 오직 정치적이고, 시민적이며, 민주적인 새로운 형태의 투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PKK의 주요 거점인 이라크 북부 칸딜산의 지도부. 출처: bianet
PKK 역사상 마지막이 된 제12차 당 대회에는 232명의 대표단이 참가했다. 대회 최종 성명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의 지역이 지속적으로 공습과 지상 공격을 받고 포위당하고 있으며, 쿠르디스탄민주당(KDP)의 지속적인 봉쇄 속에서도 우리는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 안전한 조건으로 회합을 가졌다.”
대표단 가운데 가장 앞줄에는 제밀 바이크(Cemil Bayik)와 두란 칼칸(Duran Kalkan)이 앉아 있었다. 이 둘은 1978년 11월 27일, 피스(Fis) 마을에서 열린 PKK 창립 대회에 참석했던 유일한 참석자이기도 했다. 개회 세션에서는 두 명의 역사적 지도자, 알리 하이다르 카이탄(Ali Haydar Kaytan)과 르자 알툰(Rıza Altun)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카이탄은 22명의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이번 대회는 이들의 추억을 기리는 의미로 헌정되었다.
PKK는 중동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무장 운동 중 하나였다. 그 시대 대부분의 무장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PKK가 군사력으로서 탄생한 장소는 레바논 남부의 베카 계곡(Bekaa Valley)이었다. 이곳은 1980년 튀르키예의 피비린내 나는 군사 쿠데타 이후 투사들이 피신한 공간이었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대대적으로 침공했을 때, 크루세이더 시대에 세워진 이 요새가 이스라엘 국경에서 불과 5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 쿠르드 전사들은 이 요새를 최후까지 치열하게 방어했고, 이에 따라 일간지 <세르크웨분>(Serxwebun)은 그들에게 “보포르트 성의 영웅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8월 15일, PKK는 베카에서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튀르키예 국가를 상대로 첫 무장 공격을 개시했고, 이로써 시작된 충돌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이번 당대회를 끝으로 종결되었다.
PKK는 10년 넘게 앙카라 정부에 맞서 사회주의 쿠르디스탄 건설의 기초를 마련하려 시도했고, 베를린 장벽 붕괴와 사회주의권 붕괴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1993년, 분쟁이 가장 유혈적이던 시기, 오잘란은 첫 평화 제안을 내놓았고, 이는 대통령 투르구트 오잘(Turgut Özal)의 수용과 함께 PKK의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인 휴전 선언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잘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쿠르드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향한 이 연약한 시도를 중단시켰다.
1999년, 유럽의 동맹을 얻어 새로운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고자 떠났던 외교 사절 임무 도중 오잘란이 체포되면서, PKK는 내부 재편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오잘란의 동생 오스만(Osman Öcalan)을 포함해 여러 지도자들이 조직을 떠났고, 조직은 ‘패러다임 전환’을 채택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던 게릴라 정당에서, 오잘란이 감옥에서 구상한 ‘민주적 연방주의’ 모델에 기반한 지역 민주화 운동으로의 전환이었다.
2013년에는 또 한 번의 전환이 있었다. 오잘란이 올해와 매우 유사한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게릴라 부대는 튀르키예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당시 이 메시지는 2007년에 시작된 ‘오슬로 회담’의 결과로 나왔다. 비록 단기간에 그쳤지만, 이 양자간 휴전은 PKK가 전투 병력을 이슬람국가(IS)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는 곧 코바니 전투의 승리와 2014년 8월 신자르 산에서 고립된 야지디족 구조로 이어졌다. 이 군사 작전은 쿠르드족에게 전례 없는 국제적 정당성을 부여했지만, 수천 명의 생명과 수많은 베테랑 지휘관들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월요일 발표된 이번 결정은 이 오랜 전환기의 마지막 장을 의미한다. PKK는 스스로 해산을 선언했지만, 마지막 성명은 하나의 새로운 정치 비전을 남긴다. 성명은 이를 “민주사회적 사회주의”라 명명했으며, 위계에 반대하고, 페미니즘적이며, 생태주의적이고, 지방자치 중심적이라고 규정한다. 이는 민족국가와 국가주의적 사회주의 모두를 거부한다. 지역 영토에 대한 집중, 성평등, 생태정의, 지역 자치가 이 새로운 비전을 이끄는 네 개의 핵심 축이다.
이 비전은 ‘구체적인 유토피아’이며, 이미 남동부 튀르키예와 북동부 시리아, 즉 북부 및 서부 쿠르디스탄에 해당하는 쿠르드 자치 지역 내 여러 지방정부에서 실험되었다. PKK의 해산은 또 다른 효과로, 시리아 북동부 자치행정부가 아사드 이후 체제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협상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도 있다. 이것은 튀르키예의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던 주요 명분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PKK와 튀르키예 국가 사이에는 어떠한 서면 또는 구두 합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PKK 대변인 자그로스 히와(Zagros Hiwa)는 BBC의 지야르 골에게 밝혔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은 PKK가 선의의 일방적 선언을 한 것이며, 쿠르드 문제의 민주적 해결을 위한 길을 열기 위해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제 과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테러 없는 튀르키예”라는 구호에서 민주적인 튀르키예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제는 관련된 다른 당사자들, 특히 튀르키예 국가가 평화롭고 민주적인 해결을 위해 정치적·법적 조치를 취할 때다”라며 “오잘란 지도자는 이 과정의 실제 이행을 감독할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려면 감옥에서 석방되어 안전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히와는 덧붙였다.
[출처] The PKK Is Gone, Having ‘Fulfilled Its Historic Mission’
[번역] 이꽃맘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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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 마니페스토>(Il manifesto)에 실린 글로 <일 마니페스토>는 1969년, 진실과 자유로운 사유가 그 어떤 것보다, 심지어 이윤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창간되었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