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보면 일본 본토의 규슈 남쪽 맨 밑에서 대만에 이르는 1,300㎞ 해상에 활처럼 연결된 200개에 가까운 섬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삼분의 일만이 사람이 사는 섬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을 류큐호, 혹은 류큐 열도라 부른다. 하지만 류큐는 이제는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어버린, 사라져버린 옛 왕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가 방문한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것이다.
불과 오백년 전 일본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그때는 홋카이도가 일본에 속하지 않았고, 선주민인 아이누족의 자유로운 천지였다. 류큐호 섬들에도 독자적인 국가인 류큐 왕국이 성립되어 있었다. 일본은 결코 균질적인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었다.
5월 15일. 우리가 방문한 이 날은 오키나와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방문하기 정확히 400년 전, 1609년 5월 15일에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영주였던 사츠마 번에 의해 침략을 당해 강제로 일본에 편입 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미군의 침략을 당하면서 오키나와에서 지상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미군과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피해를 외면한 채 전쟁을 끌어온 것이다. 결국 전쟁이 끝나고 오키나와는 전쟁의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안은 채 1972년 5월 15일까지 일본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미군정을 겪어야 했다.
▲ 후텐마 비행장 위를 날아가는 전투기 |
문득 길게 늘어선 도로를 따라가며 우리는 마치 미군기지 안에 들어온 착각이 들었다. 길게 이어진 도로가 미군기지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그런 기분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토미야마 상은 한마디를 더했다. “오키나와가 미군기지입니다."
평화의 행진, 평화의 목소리
▲ 미군기지 안에 자리한 사키마 미술관 |
바로 이 미술관의 주인이 긴 시간 끊임없이 미군과 싸워 얻어낸 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조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인은 보란 듯이 그 땅에 평화를 위한 미술관과 전망대를 지었다. 바로 미군기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미군 기지를 감시하기 위한 전망대였다.
미술관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사진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충분히 볼 수는 없었지만 전쟁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그려진 그림들을 창문 너머로 잠시 볼 수 있었다. 뒤를 돌아서며 이 고집스런 미술관의 주인이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힘겹게 얻어낸 땅에 이렇게 미술관을 지을 생각을 했던 걸까.
사실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미군과의 지상전을 경험했던 장소이다. 그리고 가장 치열했던 전쟁터이기도 했다. 석 달 정도 진행된 당시 전투에서 모두 이십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진병, 징용,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한국인 일만 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오키나와 전쟁, 그리고 이십 만 명의 희생은 순전히 일본의 천황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전쟁의 행방이 정해진 가운데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오키나와에서의 희생을 감수했던 것이다.
▲ 한국의 용산처럼 도시 한가운데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후텐마 비행장 |
미술관을 떠나 우리가 행진대열에 합류했을 무렵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예상보다 무척 규모가 컸다. 얼핏 보기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이렇게 행진을 하는구나!‘ 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본 본토에서 왔다고 했다. 올해는 대략 1,500여 명의 사람들이 본토에서 왔고, 오키나와의 주민들과 함께 세 그룹으로 나뉘어 오키나와 각지에서 바로 현민 대회 장소인 기노완 해변공원 야외극장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이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많은 사람들이 도로를 걸어가는 모습은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어서였을까 현민 대회로 향하는 길은 심심하지 않았다. 따가운 볕과 날씨에 지칠 만도 한데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밝아보였다. 외국의 집회·행진 문화를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한국의 그것과는 다소 달라보였다. 아담하게 좌우 몇 줄 로 길게 늘어선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한참 생각해보니 주위에 경찰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회가 불편하게 보이는 건 경찰들의 과장된 행동 때문이라는 것을. 물론 경찰은 내내 따라다녔지만 버스로 시민들이 보지 못하게 막거나 진로를 통제하는 우리네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사복차림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모습으로 행진 대열을 간간히 돕는 정도였다.
▲ 현민 대회로 향하고 있는 일본 본토 참가자들 |
같이 걷다보니 함께 행진하는 이들이 우리의 국토순례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515에 맞춰 행진을 하러 온 본토 일본인들은 대게 노조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라고 했다. 515에 맞춰 평화의 섬 오키나와를 응원하기 위해 찾은 것이다. 하지만 대게 이들은 미군기지 앞에서 헌법 9조 보장과 안보조약 폐기를 외쳤다. “베이군기치 데떼이께(미군기지 나가라)”를 외치던 오키나와 지역 활동가들과는 조금 다른 목소리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대게 미군기지 문제보다 헌법 9조(평화 헌법이라 불리는 일본의 헌법 9조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에 의해 만들어진 조항으로 일본의 전력(戰力) 보유 금지와 무력 행사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사실 이런 날이 아니면 미군기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동안 일본의 평화헌법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핵우산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모순적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헌법 9조를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미군기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본토의 참가자들. 안보 혜택은 누리면서도 정작 그 피해는 오키나와에게 떠넘기고 있는 현실. 그것은 어쩌면 미군과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단지 미군을 반대하는 이들의 차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515를 바라보는 두 지역(본토와 오키나와)의 역사적 차이가 함께 걷는 이곳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평화, 그리고 일상의 삶을 지키려는 이들
현민대회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은 단조로운 행사였다. 예정된 발언자들이 하나씩 단상 에 올라 발표를 하는, 그래서 조금은 엄숙하고 조금은 지루한 행사였다. 우리의 집회처럼 누군가 올라 무대의 공연으로 흥을 돋우거나 힘 있는 구호로 사람들을 집중시키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아, 따분해~’
한국에서 집회나 행사를 경험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피곤한 기색 없이 발표자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충분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발표자들은 힘주어가며 자신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끌어내려 애쓰는 듯 했다.
▲ 「평화와 일상생활을 지키는 오키나와현민 대회」커다란 행사장이 가득 찼다. |
「평화와 일상생활을 지키는 오키나와현민 대회」 우리가 참석한 현민 대회의 정식명칭이었다. 이번에 오키나와를 방문하며 우리는 이 ‘일상 생활을 지키는‘이라는 글자를 자주 보게 되었다. 한국에서라면 생경했을 이 단어가 오키나와 주민들에겐 제법 익숙한, 그리고 특별한 의미를 지닌 듯 했다. 사실 수십 년간 훈련 소음과 미군범죄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었을 주민들이 진정 지키고 싶었던 건 이런 조용한 일상의 평화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방문했던 다카에와 헤노코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다카에는 오키나와 북쪽에 자리한 아름다운 산촌 마을이다. 마치 밀림처럼 우거진 거대한 숲 뒤로는 푸른 바다가 넓게 펼쳐진 이곳에 미군은 해병대 훈련을 위한 헬기 연습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게 농민들인 다카에의 주민들의 투쟁은 대게 미군 훈련장의 입구에 천막을 치고 군인과 인부들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공사를 진행하려 하면 마을 사람들이 나서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물어보았을 때 건설을 막기 위해 큰 싸움이 있었는지 기대해보았지만, 그들의 대답은 공사를 중단하기 위해 인부들을 말로 설득한다고 했다. 주민들에게 그것은 요란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래서 대답을 듣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 헤노코의 바닷가에서 주민들과 함께 |
“우리는 미군 훈련장을 막아내는 것만큼 우리의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다카에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코지 상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미군 훈련장을 막아내는 일도, 내일의 식량을 준비하는 일도 같은 거라고. 그들이 말하는 ‘일상생활’을 지켜내겠다는 진심이 전해왔다.
▲ 다카에의 아름다운 바닷가 절벽. 바닷가에서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싸우고 있었다. |
끊이지 않는 전쟁연습으로 빼앗긴 땅, 병들어가는 자연환경 속에서도 주민들은 여전히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현민대회는 그런 일상을 지켜보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발걸음. 오키나와 전체는 마치 미군기지처럼 곳곳에 군대가 들어서있지만 스스로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는 주민들의 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애써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지난 평택 대추리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그들을 그토록 강하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지금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어쩌면 오키나와라는 미군기지에서 살아가며 ‘일상을 지키려는’ 끈질김으로 그렇게 싸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올해도 농사짓자’
오키나와를 생각하다 문득 그 말이 생각나 가슴이 아팠다. 아직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싸움인 사람들이 생각난다.
* 박정경수님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간사로 일하고 있다.
* 방방곡곡99절절을 연재하고 있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는 2011 글로컬 페미니즘 학교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www.glocalactivis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