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 특징
전근대 사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자면 대상과 주체를 분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유기적 총체성(organic totality)에 기초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각주1)
자연과 사회와 사람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작동하는 구조, 그리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인간 사유의 양식도 유기적 총체성을 띈 사회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대상은 인식하는 주체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로서 대상 자체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내 눈 앞에 대나무가 있다고 할 때 대나무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대나무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곧 대나무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만이 가능하다.
왕양명이 하루 종일 대나무를 보고 있었지만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대나무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대나무와 나와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문제를 던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왕양명은 대나무와 나와의 관계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곧 대나무에 대한 실천을 매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나무와 나와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고 따라서 대나무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은 조건에서 대상과 주체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론적 해결, 소위 진리에 대한 문제는 儒家의 경우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의 해결책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리가 내 마음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고 간주하거나[心卽理] 아니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理[이를테면 天理]를 주체인 내가 일정한 틀을 갖고 궁구해나가는[格物] 방법이다. 주체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 자체에 대한 궁구는 그 어느 경우에도 제기될 수 없는 문제였던 셈이다.
道家의 경우에도 대상 자체에 대한 탐구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대상과 주체의 관계에서 볼 때, 도가는 대상의 진리는 道이며 주체인 나는 다만 도를 내 몸에서 실현하는 것, 곧 자연스러운 실천이 문제가 될 뿐이다. 유가와 도가의 차이는 유가의 理가 만물의 理라고 해도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인 차원[특히 도덕]에 한정되고 있는데 비해[修己治人] 도가의 그것은 자연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물 자체라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2절. 근대란 무엇인가
이에 비해 근대 사회는 전근대와 근본적인 점에서 차이를 갖는다.
먼저 본고에서 말하는 근대란 경제사적 측면에서는 전자본주의 사회와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자본주의를 의미한다. 그것은 노동주체의 사회적 존재형태에서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노동력이 존재하고 있으며, 생산관계의 형태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사회관계가 物象的 관계로 전화되어 物과 物의 관계로 현상한다는 특징을 갖는다. (각주2)
인식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근대 사회와 달리 근대의 인식에서는, 위와 같은 조건 하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면서 인간과 사회 혹은 자연과의 관계는 物化되어 객체는 물론 주체 역시 대상화된다. 이러한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통하여 이제 대상은 분석의 대상(곧 인간에 의한 자의적인 작용의 대상)이 된다.
이 분석은 보편적으로, 또한 等價的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것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며, 이는 다시 대상의 질적 측면까지를 量化하거나 아니면 양화될 수 없는 부분은 배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대상을 분석함으로써 객관적으로(흔히 ‘과학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양화된 대상은 예를 들면 물리학에서는 세포, 물리학에서는 분자, 사회에서는 가치와 같은 것으로 환원된다.
이제 객체와 분리된 주체는 대상화되어 특정한 요소로 환원되게 되며, 스스로도 생산과정에서의 분업에 필요한 한 부품 혹은 요소와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된다. 원자론적 사고가 일상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근대의 특징이다.(각주3)
다른 한편 생산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근대 사회에는 性的, 사회적 분업이 주요한 분업의 형태였음에 비해 근대 사회는 생산과정에서의 분업이 더 중요한 형태가 된다. 이에 따라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분업의 분해 정도만큼 분해되며 소외 역시 확대된다.
근대적 분업에 기초한 소외는 이론에서도 반영되어 이론의 분석적이며 분절적인 경향이 강해진다. 물리학적으로 참인 것이 화학적으로도 참인지, 나아가 자연이나 사회, 그리고 몸에서도 참임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교환가치를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의학에서 개별성[情]보다는 보편성[性]을 추구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한의학에서도 증상들을 변증하여 병의 본말을 가리고 개개인이 자연과 사회와의 연관 속에서 드러내는 神을 알아내기보다는 病名이라는 보편성을 선호하게 한다.
식물의 분류에서도 이런 예를 찾을 수 있다. 주례에서 식물을 그것이 서식하는 토양에 따라 분류한 것은 그 식물을 자연과의 연관 속에서 분류한 것이다. 그 식물이 어떤 토양에서 자라는가 하는 문제는 그 식물의 성장조건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주체인 ‘나의 몸에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습한 곳에서 자라는 식물은 습기를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은 나에게 습기라는 기를 준다. 나는 기를 매개로 그 식물과 끊을 수 없는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이해방식은 우주 전체에 대한 보편적 인식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다음의 글은 대상에 대한 전근대적인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침저녁으로 화초들을 보니 그 性이 습기에 마땅한 것과 건조함에 마땅한 것이 있고, 또 차가움에 마땅한 것과 따뜻함에 마땅한 것이 있었다. 그래서 심고 물을 주고 햇볕을 쪼일 때마다 한결같이 옛날 방법대로 하였고, 옛 법에 없는 것은 혹 전해들은 것을 참고하였다. ... 그런 뒤에야 제각각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었다. 이것은 다만 화초 각각이 타고난 천리[天]를 온전하게 하고 각각의 성을 따랐을 뿐이지만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天性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양생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각주4)
전근대의 인식은 습기나 한열과 같은 대상이 갖고 있는 자연과의 연관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주체인 나와 결합된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확충하여 양생법으로 내 몸을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면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도 통하게 된다.
이에 비해 근대적 인식은 대상을 대상 자체로 분리한다. 근대 학문에서 내거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cetreris paribus)’이라는 전제는 바로 이러한 분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근대 학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근대 학문에서 ‘다른 조건’은 불순한 요소로 배제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다른 조건이 변한다면 분석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거나 변화하는 모든 조건 하나하나에 대해 그 조건 이외의 다른 조건을 고정시킨 분석(아마도 무한한 경우가 나오겠지만)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근대 학문에서 얻은 진리는 ‘다른 조건이 변한다면’ 더 이상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한 ‘조건’은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근본적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는 전제는 현재 분석할 대상 이외에 그 대상에 영향을 주는 모든 요소를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각주5)
(각주1) 총체성의 개념에 대해서는 카렐 코직크(1967), 박정호 옮김, 구체성의 변증법(거름, 1984) 참조. 독일 관념론에서 제기된 총체성 개념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대두된 배경에는 전근대 사회의 해체된 총체성에 대한 회귀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위로)
(각주2) 芝原拓自(1972), 김홍식, 이영훈 옮김,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비봉출판사, 1990) 제4장 및 박교인 편역, 「편역자 서문」, 현대세계경제체제론(청사, 1985) 참조. 본고의 논의에서는 생산주체의 사회적 존재형태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논의에는 생산주체의 사회적 존재형태라는 문제가 깔려 있다. 이는 특히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대부분의 논의가 개별화된 추상적 주체라는 문제에 빠져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 있다. 역사에서는 소위 ‘微視史’가 득세하고 의학, 넓게는 생물학은 분자의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철학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많은 논의가 전근대와 단절된 근대에서의 탈피라는 추상적 차원에서 머물고 있다. 근대(modern)는 전근대(pre-modern)를 자기의 생성근거로 갖고 있으므로 전근대에 근거를 갖지 못하는 모든 근대를 벗어나려는 시도(post-modern)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 (위로)
(각주3) 이와 달리 이마무라 히토시는 근대를 기계론적 세계상, 생산주의적-계산적 이성, 진보시간론이라는 틀로 규정하고 있다. 이마무라 히토시(1996), 이수정 옮김, 근대성의 구조(민음사, 1999) 참조.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근대 혹은 전근대에 모두 공통될 수 있는 형식적인 측면을 부각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근대를 규정하는 조건으로 사용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인간기계는 열자 「탕문」(열자는 기원전 400년 경의 인물이며 이 책의 成書 연대는 漢代 정도로 추축된다)에 이미 나오고 있다. 기계가 문제되는 것은 그 기계가 어떤 사회에서 작동되는가 하는 것이지 기계 자체가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계로 무엇을 생산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하는가, 어떤 사회에서 생산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주의적 이성이란 생산이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생산주의가 근대적 성격을 갖는 것은 그것이 무한한 이윤추구, 곧 자본의 재생산을 확대시키는 수단이 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생산주의 자체가 특정한 시대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마치 상품의 존재 자체로 전근대 사회에 이미 자본주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또한 순환적 시간관에 대비되는 직선적, 진보적 시간관 역시 근대에만 특이한 것으로 볼 수 없다. 미분된 등질적 시간이라는 개념은 분명히 근대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근대의 환원적, 분석적 인식의 특성이 반영된 것일 뿐이다. 시간 자체가 진보하는가 순환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특정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기화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주객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단순히 진보적 시간관의 여부로 근대와 전근대를 나눌 수는 없다. 이러한 문제는 저자가 노동 주체와 대상의 문제, 곧 주객의 문제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한 것의 두 측면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의 문제에 있어서 남녀는 분명 동일한 것(인류)의 두 측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무차별적으로 동질적인 것은 아니다. 남녀는 분명히 다른 방식으로 극복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저자와 같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보게 된다면 결국에는 양자를 극복할 아무런 방법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저자가 아무리 배제와 차별을 넘어서는, 곧 근대를 넘어서는 방법으로 타자공동체와 같은 것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이론의 현실적 주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공허할 수밖에 없다. (위로)
(각주4) 강희안, 서윤희 이경록 옮김, 양화소록(눌와, 1999, 20-21 쪽). 인용하면서 번역의 일부를 바꾸었다. (위로)
(각주5) 이와 연관하여 신영복은 서구와 동양 혹은 전근대와 근대의 문제를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원에서 보고 있다. ‘존재론적 구성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의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 증식을 운동원리로 하는 자본운동의 표현’일 뿐이다. 이에 비해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가 기본적으로는 사회구성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차이는 바로 주객의 분리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신영복, 강의(돌베개, 2004. 23-24 쪽) 참조.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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