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속이는 유명한 말로 조삼모사(朝三暮四)가 있다. 중국 송나라 저공(狙公)의 고사다. 먹이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는 말에는 원숭이들이 적다고 화를 내더니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겠다는 말에는 좋아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정원 관리인의 희롱이다.
한편, ‘주체성’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는 진지한 사람들은 이 얘기에서 색다른 가치를 발견한다. 식량공급이라는 완장을 찬 사람은 간교한 꾀를 부린 것이겠으나 식량수급의 생계가 걸린 약자의 입장에서는 보다 절실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성찰이다. 주종관계에 혁명적 반전을 준다. “화를 내니 규칙이 바뀌었다”는 자각에 이어 심오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경지를 주목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아는가?” 이렇게 되면 누가 진정 어리석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꿈을 실현하는 역사엔 정해진 이행기가 없다
자본주의 유산자를 시시콜콜 살피는 진부한 제도여론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은 체제에서 배제된 무산자 모임과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흥미를 느낀다. 나는 올 봄 대한민국에서 출범한 사회주의노동자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이하 사노위)를 주목하고 있다. 이 단체는 수면 아래에 존재하던 기왕의 혁명운동 노동자들과 지식인 분파의 무시할 수 없는 ‘집단지성’이 넘쳐난다. 오늘은 사노위만 언급하지만 그 밖의 정치조직도 다룰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사노위 활동은 당 추진위 전환까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전환조건으로는 (1)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과 노선에 입각하여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것 (2) 위 기본 요건을 확보할 경우 기존 조직들은 해산. 이때부터 사노위는 단일조직으로 운영 (3) 기존 조직들의 해산과 동시에 추진위 전환을 할 것인지, 아니면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의 실천적 권위 확보 문제를 고려하여 차후에 전환할 것인지는 그 시점에서 총회를 거쳐 결정.”
세부적인 실행방안은 이런 기본적인 구상아래 설정돼 있다. 사노위 활동의 최우선 사항이 통일된 강령 도출임을 밝히고 있다. ‘강령’이라는 것이 강령위원들의 주장의 산물을 넘어 구성원 모두의 성숙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고 정치조직이 자기운동의 주체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열망을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때,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험난한 고비를 넘겨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강령논의 자체가 일정한 사회운동이다. 안심할 수 없는 이유다. “강령이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게으른 푸념은 일단 접는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다. 대내외 노동자투쟁에 일상적으로 결합하고 강좌를 열며 서로 알아가는 과정을 밟고 있는 가운데 사노위 강령이 3~4단계 아래의 맹아의 결실을 맺어가고 있다. 사실 나는 나의 기대와 달리 사노위 지도집행부의 이력과 성향을 거의 알지 못하며 문건 속에서나 낯익은 이름과 낯선 주의주장을 발견할 뿐이다. 만약 회원의 자격이든 참관자의 자격이든 지난 결성대회처럼 ‘인물선출’과 ‘안건결정’에서 겨우 표 하나를 보태는 거수기에 불과한 성원이 있다면, ‘당신’은 바로 ‘나’의 다른 몸체일 뿐이다. ‘동지’를 모르지만 ‘동지’라는 호칭이면 충분한 권위다.
사노위에서 강령의 ‘경과와 쟁점들’이 공개되었다. “지금까지 강령기초위원회는 모두 8차례 회의를 가졌다. 논의는 ‘체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토론 항목들을 끌어내었다: ① 역사적 시대규정의 문제 (현단계 자본주의 규정과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 제3세계 국가 및 민족해방 문제를 포함) ② 이른바 ‘현존사회주의’의 성격과 평가 ③동북아와 한반도(전쟁 문제를 포함) ④ 선거와 ‘부르주아 노동자당’에 대한 태도 ⑤ 여성해방의 문제 ⑥ 노동조합에 대한 태도 ⑦ 공동전선과 인민전선 ⑧ 민주적 제권리 투쟁에 대하여”
나는 이 요약된 쟁점 가운데 큰 목록에 딸려 있는 아주 세부적인 한 가지만 주목하고 간추려 소개한다. 이것이 무난할 것 같다. 그리고 공개토론을 위해 두 개의 내 의견을 사족으로 붙인다.
“20세기는 제국주의 전쟁과 혁명을 경험한 세기였다. 평화의 문제는 삶의 기초를 이루는 해방의 내용을 구성하고 혁명의 경로로서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인데, 이는 비폭력운동으로 도피하는 것일 수 없다. 또한 계급투쟁의 문제설정만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 인종청소, 대량학살 등의 문제들에 대한 발본적 비판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차원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중요한 과제이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화체제는 협소한 체제통합을 넘어서, 부르주아 전쟁을 넘어 항구적 평화체제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일부의 발제에 대한 일부의 문제의식이 함께 제출되어 있다. 반론의 핵심은,
“이러한 ‘평화체제 구축’ 전략은 사회주의 혁명전략과 모순이 된다. 특히 남한에서 노동자혁명은 이를테면 북-미간에 (한반도에 대한) ‘평화협정’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 노동자혁명이 일정에 올라와 있을 때 미국 등 제국주의와의 투쟁의 문제가 제기된다는 점,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 차원에서 제기된 상호군축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군사강령인 ‘상비군의 폐지’, ‘노동자의 무장’과 대립된다. 또한 이 ‘평화체제구축’론은 왜 한반도가 전쟁 위기에 놓여 있는지 본질적 원인이 무엇인지 따라서 어떠한 해결책이 요구되는지에 대하여 비껴가는 주장이다.”
여기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행기 사회상에 관한 입장, 진행되고 있는 세계혁명의 방향, 현실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 등, 귀결이 다른 사회과학적 분석이 책임일꾼간의 대립되는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핵무기, 핵발전소, 군축을 둘러싼 보다 구체적인 사안이 각자의 전체 노선에 연결된 뇌관 장치로 작동한다. 하기에 논의가 무르익을수록 더욱 격렬한 토론이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이쯤에서 온건하지만 도발적인, 유사하지만 고민의 층위가 다른 내 개인의견 하나를 더하여 약간의 자극을 주기로 하자.
“나는 반혁명 예방을 명분으로 한 역사적인 혁명계급의 ‘상시적 무장력’을 갖춘 ‘영구’ 독재 사상을 거부한다. 세계적인 사회혁명에서 이행기는 추상이며 그 시간을 상상할 수 없다. 평화를 향한 적극적인 열망은 사회주의 사상보다 먼저 발전할 수 있다. 반혁명 권력의 시기에도 인류의 이성은 선행된 혁명의 경험으로 인해 퇴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혁명은 교체된 계급권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와 생활방식의 도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운동의 섭리와 같이 역사에서도 반혁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노위에서 공식적으로 대립되는 견해는 남미의 좌파정권을 바라보는 눈에서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에 대해서는 다소의 비관 속에 동의를 유보하고 있는 간단한 참고 글을 인용한다. “예외적으로 차베스는 맑스주의와 시몬 볼리바르의 민족주의를 혼합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코레아와 모랄레스의 경우 두 사람 모두 계급간의 충돌을 회피하며, 부패한 독재정치에는 ‘시민혁명'으로, ‘유럽의 독재’에는 문화적으로 탄압받는 안데스 인디오 공동체들로 맞서고 있다.”
“경제민주화 혹은 노동자의 힘 측면에서는 20세기 칠레 사회주의와 유고의 자주관리가 21세기 사회주의의 의회선거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게다가 과거에는 권위적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도 정책결정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의견에 대한 고려는 현재 21세기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진전되었다. 21세기 사회주의의 보다 확장된 개방성은 그들이 이전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낮은 군사적 긴장에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비록 21세기 사회주의가 덜 급진적이고 그들의 정치가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는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21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군사주의와 개입주의에 대해 반대편에 서 있으며, 천연자원들에 대한 통제를 실시하려 하며, 사회조직들에 대해 보다 큰 포용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들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통해 본 라틴 아메리카의 21세기 사회주의』란 제목의 제임스 페트라스 논문의 결론 부위다.
사노위 강령논의 가운데 나는 핵발전소 문제를 돌출시키고자 한다. 내 소견을 여러분에게 제출하며 두려움 없는 토론이 기탄없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열띤 광장을 보고 불쑥 내지르는 뜬금없는 외마디 비명이면 어떤가?
토론제안
“꿈의 원자로”에 반박하여 “활주로 없는 비행장”, “전쟁의 병기창” 등의 표현을 동원했던 수십 년간의 머리 터지는 싸움은 생략한다. “우라늄 연료는 고속증식로(FBR)에서 확대재생산 된다”는 핵 마피아들의 마이크에 대고, “그러니까 토끼를 뻥튀기 기계에 넣어서 토끼는 토끼대로 불려 먹고 식인상어 한 마리를 새로 빼낸다는 얘기냐?”와 같은 상식적인 소비자 의식을 내세우지 않겠다. “인간의 과오, 취급 면허증을 가진 정보요원의 사소한 실수”, “핵겨울”, “원폭살인”, “파멸적 자기증식운동” 등의 용어가 필요한 피해의식적인 선전선동도 제쳐둔다.
핵심만 간단히 의견을 낸다.
1. “과학기술은 계급지형 즉, 자본과 노동의 대립체제에서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는 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반핵평화 반핵군축운동 세력은 두 가지 강령을 공유하고 있다.
* 총자본의 군수산업 복합물인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영구 폐기한다.
* 야만의 무기경쟁을 종식하고 노동자의 평화적 산업기반을 다진다.
2. 인민의 삶을 질곡으로 안내하는 기술은 문명의 진화가 아니라 진화를 다한 문명의 육체적 퇴화다. 과학기술이 당파성을 갖는 이유다.
‘에너지 수급과 전쟁 억제력’이라는 명분으로 개발된 핵발전소는 대다수 사람에게 공포의 수위만을 높여왔다. 실제의 위험은 체감되는 공포보다 훨씬 높다. 핵발전소가 만들어내는 방사능 물질은 매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생긴 그것의 천배가량 된다. 폐기된 방사능은 백내장, 수명단축, 암, 불임 등 각종 질병을 만연시키고 있으며, 예언적으로는 인간의 유전자 전체를 변이시킬 것이라는 보고가 제출되어 있다. 한편 핵발전소가 핵무기의 원료인 플루토늄 생산기지라는 점을 설명하여 핵발전소의 ‘침략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핵 개발을 위한 총비용과 건설가격, 건설가격만큼 비싼 폐기비용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감시에 들어가는 경제적인 문제는 이러한 근본적인 입장과 함께 부가되는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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