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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교사와 직원은 교장의 명을 받아 직무를 수행한다. ②사립학교 교원은 권고에 의하여 사직을 당하지 아니한다. ③교원은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속 학교 장의 동의없이 학원 안에서 체포되지 아니한다. ④학교교육에서 교원의 전문성은 존중되며, 교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는 우대되고 그 신분은 보장된다.(2005년 교원임용고시)
정답은? 초·중등교육법이 제정되기 전인 ‘교육법’ 제75조의 규정을 따르던 불과 얼마 전까지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하게 되어 있었다. ‘교장의 말이 곧 법’이던 시절, 이 조항은 국가공무원법제57조·사학법제55조(복종 의무)와 더불어 교사의 창의적인 교육활동을 옥죄는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그 밖에도 교사들의 교육권은 물론 시민권과 생존권마저 위협하는 각종 악법들이 교사 통제 장치로 작동하고 있어서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가치를 몸으로 배우고 호흡한 젊은 교사들의 악법 개폐에 대한 요구가 드높았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전교협이 주력한 일은 교협 조직 확대 사업(88년 말까지 121개 시·군·구 교협 결성), 사학정상화 투쟁 지원에 더하여 교육악법 개폐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9·27 결성대회에서 ‘교육악법 철폐와 민주교육법 제정을 위한 교사서명운동’을 결의하면서 일찍이 시작되었다. 10월 25일 <교육악법 개정 촉구대회>(서울 아현동성당)까지 10,242명의 교사 서명을 조직했다. 이 날 기조강연을 한 이철국(현 고양자유학교 교장)은 “교육관계법은 교육의 주체인 교사 학생 학부모의 권리를 보장하면서 교육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현 교육관계법은 오히려 교육을 파괴하고 주체의 권리를 침해하는 악법”으로 규정하고 그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전교협은 악법의 실체를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추진하여 88년 3월 전교협총서 1, 2권으로 단행본 『교육악법·교육자치제』와 『교육판례』(도서출판 미래)를 펴내 위력적인 이론전의 무기를 확보했다. 그즈음 민정당이 지배하던 국회는 3월8일 전교협이 요구한 교육악법 조항은 전혀 손대지 않고 교육위원을 지방의회에서 뽑는 교육자치제에 관한 교육법 개정안을 야당의원이 퇴장한 가운데 단독 처리했다.
2월 26일 전교협 제1차 대의원대회가 지속 추진을 결의한 교육악법개폐 투쟁은 88년 4·26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조성되면서 탄력을 받게 된다. 전교협은 5년 중임 또는 10년 단임을 내용으로 한 민정당의 교장임기제 방안을 저지하고 교장 선출, 교육경력 이외의 교장 자격제한 폐지, 교장 권한 대폭 축소, 평교사에게 이양 등을 담은 교장임기제와 평교사회 보호, 교무회의의 학사행정에 대한 의결기관화, 학생회 직선제·예산집행권 부여·민주적 운영 보장(학교단위 교육자치 실시), 학교예산 집행 공개의 법제화와 사학 재정비리 척결과 사립교원 신분보장, 교육세 전용 방지, 영세 사학 국고보조 강화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로 했다. 중심 의제로 떠오른 것은 ‘교무회의 의결권과 교장선출(임기)제’였다. 교원의 노동3권 보장도 이때부터 핵심 슬로건에 포함되었고 국정교과서 제도 폐지도 주요 요구사항으로 등장했다.
이 투쟁은 법제도 개선을 위한 대중투쟁의 모범 경로를 밟았다. 먼저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교사 서명운동으로 다수의 동의를 결집한 후, 법개정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공청회나 토론회 조직, 연이어 교사대중집회 개최, 그리고 중앙 집중 투쟁으로 국회와 정당을 압박하는 방식이었다.
전교협은 6월 14일부터 전국 교사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표집 556명) 결과를 7월 3일 ‘민주교육법 쟁취와 보충자율학습 폐지를 위한 전국교사대회’(성균관대 금잔디광장, 2,500여 명 참가)에 즈음하여 발표, 여론을 환기하였다. 교사들은 노동3권과 교원노조 결성의 자유 보장(79.1%)과 근평폐지 또는 전면 공개(96.5%)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