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삼성경제연구소] |
게다가 7월 스페인과 이탈리아로의 위기 전염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면서, 이들 국가의 국채금리와 CDS 프리미엄이 급상승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유로존 역내 경제규모의 28.4%를 차지하는 국가들이고, 이 두 나라의 재정위기는 이들에게 대출을 해준 프랑스와 독일 금융기관의 부실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로 부상했다. 이번 EFSF 증액 및 역할확대 방안은 이처럼 더욱 악화된 상황에 대한 유로존 17개국 정상들의 대응방안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이 유럽 재정위기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어보인다. 이번 대응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그리스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당분간 지연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FSF 증액 및 역할 확대 방안
지난 7월21일 유로존 17개국 정상들은 유럽금융안정기금(EFSF) 증액 및 역할 강화와 그리스에 대한 2차 구제금융 지원을 합의했다. 즉, EFSF가 발행시장 뿐 아니라 유통시장에서도 국채를 매입할 수 있도록 역할을 확대하고, EFSF의 가용자금을 기존 2,500억유로에서 4,400억유로로 증액하며, 이 중 1,090억유로를 그리스 2차 구제금융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유로존 17개국 의회 EFSF 법안 통과 과정에서 전 세계 이목은 독일에 집중되었다. 이전부터 역내 최강국으로서 독일은 재정위기국 지원이 ‘도덕적 해이’를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29일 독일 하원에서 메르켈 총리는 재정위기국 지원에 난색을 표하는 의원들을 설득해냈다.
그러나 이것이 메르켈 총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태도 선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내 금융시장 통합으로 유럽 금융기관들은 타 회원국의 국채 보유 및 은행대출을 크게 증가시켜왔다. 가령, PIIGS 5개국으로 위기가 확산될 경우, 독일은 1,134억 달러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구제금융이라는 것도 실은 자국 금융자본의 부실화를 막기 위한 방안이다.
하지만 이번 EFSF 증액 규모가 선진국으로의 부실 전염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FSF의 가용자금 4,400억유로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로의 위기 전염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11년 8월부터 2014년 12월까지 스페인, 이탈리아를 포함한 재정적자국의 만기도래 국채(1조 1,770억유로)와 재정적자(6,240억유로)를 모두 합하면 1조 8,000억유로로 예상되고 있다.
그리스의 ‘질서있는 디폴트’, 가능한가?
이러한 조건에서 지배세력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려 한다. 첫째, EFSF 법안 통과에 이어 획기적인 채무조정(부채 탕감)을 통해 그리스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스 국채 보유 민간투자자들은 2차 구제금융 시 약21%의 채무조정에 합의한 바 있는데, 독일과 네덜란드 등은 이를 50% 수준으로 상향조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간채권단이 이러한 상향조정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채무조정이 일반화될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스페인 국채 매각이 가속화되면 결국 위기가 PIGGS 국가들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둘째, EFSF의 추가자본을 확충하고자 한다. 위기의 전염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전염가능성이 높은 스페인, 이탈리아에 대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시장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2조유로(원화로 약 3,000조원) 이상의 자금 확충이 요구된다. 이 액수는 유로존 내 국가들이 부담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가이트너 미 재무부장관의 경우 EFSF가 보증하는 특수목적회사(SPV)를 활용한 레버리지 확대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EFSF는 각국 분담금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레버리지 확대는 결국 독일과 프랑스의 신용악화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EFSF 최대 분담금을 내고 있는 독일이 “남한테 충고를 해 주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 보다 휠씬 쉬운 일”이라며 미국의 레버리지 제안에 적극반대하는 이유다. 또한 EFSF의 신용공여(보증)를 통해 4,400억유로의 EFSF 가용자금을 약2조유로까지 확대하는 이 방안은 실제 PIGGS 국가들의 국채에 문제가 생길경우, ECB까지 신용위기에 처할 위험성이 높다.
정리하면, 만기 국채와 이자금에 대한 지급 여력 부재로 인해 이미 기정사실화된 그리스의 디폴트가 유로존 및 세계경제에 미칠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 소위 ‘질서있는 디폴트’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관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유로존 내 선진국, 민간채권단 간 이해조정이라는 수많은 걸림돌을 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시장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와는 정반대로 다른 형태의 위기가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
유로존의 모순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위기관리전략이 ‘재정동맹 없는 화폐동맹’이라는 유로존의 모순을 결코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역내 무역에서 가격경쟁력이 낮은 유럽국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저임금과 긴축재정으로 자국 노동자들에게 내핍을 강요하는 것뿐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채무상환능력을 확보하는 길과도 거리가 멀다.
이에 따라 유로존의 재정동맹을 진전시키고자 하는 유로본드(유로존 회원국의 공동채권) 도입 방안 역시 논의되고 있다. 재정위기국의 입장에서 유로본드는 많은 이점을 갖는다. 재정이 취약해지면 국채 금리도 급등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보증이 있기 때문에 국채금리를 낮출 수 있고, 이를 통해 채무상환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여건을 확보할 여지가 늘어난다. 그러나 이 역시 독일과 프랑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해있어 도입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반대로 그리스가 통화동맹으로부터 탈퇴하는 방안 역시 논의되고 있다. 그리스가 먼저 부채 및 이자 지급을 중단하고 유로존에서 탈퇴하여 고환율 정책을 통해 경상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절하는 유로화 표시 대외채무를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고, 운송과 관광에 편중된 그리스가 누릴 경상수지 개선효과도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그리스가 이러한 선택을 할 가능성은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동맹 없는 화폐통맹’이라는 모순과 역내불균형 문제가 지속되는 한 화폐통맹으로부터의 철수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될 것으로 보인다.
전망: 불안한 미래
따라서 현 상황에서는 유로존의 모순을 간직한 채 디폴트를 지연시키고 시간을 버는 기존 정책이 지속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러한 정책이 유지되기 위해서 단기적으로는 10월23일 유럽정상회담과 그 전에 발표될 것으로 예상되는 유럽은행들에 대한 3차 스트레스테스트 결과, 24일 EU․ECB․IMF 트로이카실사단 발표라는 고비를 넘겨야 한다. 이어 11월 칸 G20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이 EFSF 추가자본 확충과 관련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기로 할 경우, 시장의 불안은 당분간 다소 진정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재정위기국의 채무상환능력이 확보되지 못하면서, 재정위기국의 국채만기시점 마다 불안이 심화될 계기가 상존한다고 볼 수 있다. 역내불균형이 지속되고 구제금융을 받은 국가들에게 긴축정책이 강제되는 한, 위기가 심화되고 확산될 가능성은 내재해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 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 10월 초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국가신용등급이 연이어 하락하면서 위기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럴 경우 스페인, 이탈리아와 강한 금융연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 독일, 영국 금융기관으로의 위기전염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면서 신용경색을 야기될 것이다. 나아가 프랑스 은행을 매개로 그 위기는 미국까지 확대될 수 있다. 프랑스 은행과의 거래금액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 모건스탠리의 주가는 올해 들어 고점대비 최대 54%나 하락했다. 10월3일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덱시아 은행이 파산 위기에 직면하자 모건스탠리 주가는 약 7% 급락했다.
뿐만아니라, 신용경색에 처한 유럽계 금융기관이 해외자금을 본격적으로 회수하면 아시아, 동유럽, 중남미 신흥국들 역시 신용경색이 심화될 것이다. 중남미, 아시아 국가들은 대외차입금의 50% 이상을 유럽계 금융기관에 차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지난 1-7월 중 유럽계 자금이 약7조 5천억원 빠져나갔으며, 8월에만 3조원 이상이 유출되었다. 국내 채권시장에서도 8월에만 1조원 이상이 빠져나갔다.
경제위기와 극우주의의 부상에 맞선 사회운동을 강화하자
향후 유럽 재정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추가적 대응방안들이 꾸준히 논란이 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획기적인 채무조정, EFSF의 더 많은 증액, 유로본드 도입, 유로존 탈퇴 등 여러 추가적 대응방안들이 이미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독일 등 선진국과 투자자의 이익 보장이 최우선시 되는 한, ‘시간벌기용 미봉책’을 넘어설 대안이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지금까지의 유럽통합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점을 인식하고, ‘신자유주의적 유럽’을 변혁하기 위한 투쟁과 대안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이다.
이는 유럽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국수주의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부상하고 있는 극우주의의 위험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슬로바키아 의회에서 EFSF증액안 통과를 1차 무산시킨 자유연대(SaS)를 비롯, 프랑스 국민전선(FN), 핀란드 진짜핀란드당(TF), 네덜란드 자유당(PVV) 등의 지지율이 최근 크게 증가하고 있다.
반이민, 반이슬람, 반EU 정서를 대변하는 극우정당들은 자국민우선주의를 내세워 재정위기국에 대한 지원에 원칙적으로 반대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생활여건 악화와 유럽연합의 모순이 국수주의적 정서를 불러일으켜, 극우정당의 부상에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특히 중심국에서 경제위기를 주변국이나 국내 이주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정책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2010년 이후 유럽 각국의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긴축 반대투쟁을 전개해왔다. 최근에는 월스트리트 점거운동과 상호작용하면서 유럽연합 본부 소재지인 브뤼셀을 비롯, 프랑크푸르트, 런던, 로마로 더욱 확대되고 있다. 긴축정책 철회, 부채탕감, ECB의 신보수주의적 통화정책 폐기, 안정 및 성장에 관한협약(SPG)의 개혁 등 민주적이고 대안적 유럽을 형성해나가려는 이러한 시도는 더욱 강화되어, 보다 근본적이고 국제적인 대안으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