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7일 유럽의회는 한-EU FTA를 통과시켰다. 3월에는 인도-EU FTA 체결이 준비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06년부터 공격적으로 관세 및 비관세장벽을 모두 철폐하는 새로운 FTA정책을 취하고 있다. 첫 대상이 바로 한국과 인도다.
유럽연합은 FTA 협상에서 지적재산권을 최우선에 두고 있다. 초국적 기업들이 지적재산권 침해를 빌미로 사법절차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민형사 소송을 손쉽게 제기해 과다한 배상금을 받을 수 있고, 제네릭(복제약)을 위조품으로 간주하여 압류할 수 있는 집행조항이 포함된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 '위조방지무역협정'(ACTA)도 준비되고 있다.
소수 선진국의 이익만 보장
ACTA 협상은 미국, 유럽연합, 일본 등 소수 선진국이 주도하고 있다. 2008년 6월부터 한국 정부도 이 협상에 참여하고 있는데, ACTA는 사실 위조 상품의 유통을 막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위조 상품은 지금의 국제조약으로도 처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들이 ACTA에 열을 올리는 것은 지재권 강화를 통해 얻는 흑자폭을 더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ACTA는 수출국이나 수입국의 지재권을 침해하지 않더라도 환적(운송중인 화물을 옮겨 싣는 행위)하는 국가에서 지적재산권의 침해 여지가 있으면 세관의 압류 조치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2009년에 브라질로 가는 인도산 제네릭이 네덜란드에서의 환적 과정에서 압류당하는 사건은 ACTA의 폐해를 잘 보여준다. 압류된 의약품은 수출국인 인도와 수입국인 브라질에서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가 전혀 없었는데도 환적 국가인 네덜란드 세관에 의해 압류당했다. 유럽이 요구하는 지적재산권 집행조치와 ACTA가 전면 실시될 경우 이러한 일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자료독점권을 통한 의약품 독점
유럽이 의약품 독점을 강화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는 다른 하나는 자료독점권이다. 자료독점권은 의약품 판매승인을 위해 제출된 오리지널 의약품의 안전성, 유효성에 관한 임상시험 자료를 제네릭 제약회사가 사용하지 못하게 해 제네릭 판매를 지연시켜 오리지널 의약품의 독점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자료독점권이 부여되면 특허가 없거나 만료된 의약품일지라도 판매독점권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제네릭 생산과 수출을 못하게 되고, 심지어 강제실시와 같은 특허권의 공적 사용도 할 수 없다.
유럽은 2001년부터 유럽약사법의 포괄적 개정을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료독점 기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물질특허가 의약품독점을 보장하는데 불충분하다고 여겨 1987년에 자료독점권을 도입했다.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20년 동안 특허권을 보호하고 있으나, 자료독점기간은 천차만별이다. 신흥 회원국들은 자료독점기간의 확대가 보건의료예산에 지나친 부담을 줄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2003년 12월 유럽의회는 자료독점 기간을 최대 11년까지 보장하도록 결정했고, 이렇게 개정된 약사법은 2005년 11월부터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자료독점권의 확대와 통일로 미국의 자료독점권보다 더 강력한 제도를 갖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신흥제약시장의 성장에 대한 대응: 독점의 확대
의약품 전문조사기관
이런 시장변화에 따라 초국적 제약기업들은 독점을 확대하기 위해 더욱 혈안이 되어 있다. 이들은 세계 의약품 시장의 80% 이상을 차지해왔던 북미, 유럽, 일본에서 팔릴 수 있는 최대치로 가격을 결정한 후 다른 지역에도 강제한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에서 그 약을 사 먹을 수 없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독점을 통해 개발도상국의 환자 개인이나 공공의료가 파탄 날 지경까지 이윤을 뽑아내고, 제네릭이 수출되거나 수입되는 것을 막아왔다.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이 한창 문제가 되었던 때를 기억해보자. 글리벡과 똑같은 효과가 있는 인도 제네릭을 1/20도 안 되는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글리벡 투쟁의 정당성 그 자체였고, 희망이었다. 1년에 180만 원 정도면 먹을 수 있는 약을 한국의 환자들은 3,600만 원을 내고 먹어야 했다. 노바티스가 공급을 거부하는 사태로 한국 환자들이 사경에 내몰리는 일까지 있었지만, 특허청은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대신 노바티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1년에 1,000억 원가량을 노바티스에 지불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돈을 낼 수 없는 개발도상국에게 인도 제네릭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세계의 약국' 인도
인도는 개발도상국에 필요한 에이즈치료제의 90%를, 전 세계 에이즈치료제의 50%를 공급하고 있다. 에이즈치료제 외에도 항생제, 항암제, 혈압약, 당뇨약 등 전 세계 제네릭 의약품의 20%를 공급하고 있다. 인도가 '세계의 약국'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인도 특허법의 역사와 더불어 활동가들이 특허독점의 폐해를 막기 위해 특허 강화를 반대하는 강력한 운동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인도는 의약품 수요의 약 85%를 외국계 제약회사에 의존하고 있었고, 약값은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인도정부는 1972년에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를 폐지했고, 인도의 제약회사들은 제조공정을 바꾸어 제네릭을 생산할 수 있었다. 2005년에 인도는 트립스협정(TRIPs,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에 따라 의약품에 대한 물질특허제도를 재도입하게 되었지만 전 세계의 환자, 활동가들이 연대투쟁을 벌여 공중보건과 생명을 위한 다양한 안전장치를 특허법에 담았다. 인도특허법은 자료독점권이나 특허-허가 연계와 같은 '트립스 플러스' 조항을 담고 있지 않고, 무분별하게 특허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의 약국'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의 약국'을 없애려는 인도-유럽 FTA
그러나 초국적 제약기업은 인도특허법에 트립스 플러스 조항을 포함시키려고 끊임없이 소송과 로비를 하고 있다. 노바티스는 2006년 1월에 글리벡 특허가 거절되자 인도특허법이 트립스협정에 위배된다고 2006년 5월에 소송을 제기했고 지금도 소송이 진행 중이다. 바이엘사는 항암제 '넥사바'와 똑같은 약을 인도 시플라사가 판매허가를 받자 특허-허가 연계제도를 도입하고 시플라사의 판매허가를 취소할 것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었다. 로슈사 또한 항암제 '타세바'에 대해 특허-허가 연계를 주장하다 대법원에서 기각당한 바 있다. 인도에 있는 초국적 제약기업들의 연합인 OPPI는 자료독점권, 특허-허가 연계, 인도특허법의 개정을 촉구하는 로비를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개발도상국 민중의 죽음을 부를 자료독점권
이런 초국적 제약기업의 요구를 한방에 관철시키려는 것이 인도-EU FTA다. 3월에 체결 예정인 인도-EU FTA는 의약품자료독점권과 지적재산권 집행조항에 대한 합의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적재산권 조항에 대한 대립 때문에 유럽연합이 이번 FTA에 유럽식 자료독점권을 비롯하여 트립스 플러스 조항을 다 포함할 것 같지는 않지만, 자료독점권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세계의 약국'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다. 초국적 제약기업들은 효과가 더 낫지도 않은 약에 대해 더 수월한 방식으로 독점을 획득하여 제네릭의 생산을 막고 비싼 약값을 받으려 한다. 자료독점권은 인도처럼 특허요건이 엄격한 나라에서 특허가 없는 약에조차 독점을 획득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될 수 있다. 인도에서는 글리벡 외에도 에이즈치료제 '칼레트라', '비레드' 등이 특허가 거절되었고, 제네릭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특허가 거절된 약들에 자료독점권이 주어진다면 자료독점 기간동안 제네릭 판매, 수출이 불가능해진다. 이 말은 120개국이 넘는 개발도상국의 민중에게 죽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