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조사와 분석을 통해 살펴보면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 이래 지금까지 학살당한 이라크인의 숫자가 1백2십만 명이 넘는다(http://www.justforeignpolicy.org 참고). 이는 1994년 르완다 학살 당시 사망한 숫자를 훨씬 넘는다. 또한 사망한 미군의 숫자는 4천2백여 명이고 이라크 전쟁에 쏟아 부은 돈은 6천억 달러에 달한다. 여기에다 4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이라크 전쟁난민, 50%가 넘는다는 실업률, 파괴당한 이후 복구되지 않은 사회기반시설, 해체된 교육.의료.복지 시스템 등을 고려하면, 6년이 다 되어 가는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사회를 말 그대로 ‘황폐화’시켰다. 더욱이 미군의 전쟁과 점령이 부추긴 분열정책으로 인해 이라크 국민들은 종족과 종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라크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학살과 파괴의 책임은 온전히 미국에게 있다. 대테러전쟁이라는 일방적인 전쟁정책을 밀어붙인 학살자 조지 부시와 그 일당은 당연히 전쟁범죄자로서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주범이다. 미국의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억지논리로 아무런 동의도 없이 무력을 동원하여 전 세계적 계엄령을 발동해서 침략과 점령으로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였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도 찾아내지 못했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파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평화를 짓밟았으며 세계적으로 폭력과 불안을 증가시켰다.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무장집단은 늘어났고 폭력은 폭력을 확대재생산했다.
부시는 이라크 침략 직후 ‘임무완수’를 선언했지만 완수는커녕 이라크라는 수렁에서 허우적대며 더욱 깊이 빠졌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다. 7년이 되도록 전개된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은 미군과 나토군을 승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전쟁 초기 임시행정처와 이후의 과도정부를 거쳐 선거를 통한 정부를 구성했지만 알 말리키 총리가 이끄는 현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저항세력으로부터는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국내 정치적 지지를 잃은 부시 정부와 이라크 내의 미군 철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라크 정부는 최근 일 년여 동안 이라크 내 미군의 주둔 지위에 관한 협정을 맺기 위한 협상을 해 왔다. 안보협정, 혹은 주둔군지위협정(SOFA)으로 불리는 이 협정은 2008년 말로 미국에 대한 유엔의 위임시한이 끝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미군주둔 상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었다. 애초 철군 시한 명시여부, 이라크 정부 승인없는 영토 사용문제, 미군의 면책권과 사법관할 문제 등에서 대부분 미국 측의 요구가 부각되었으나, 논란과 수정을 거듭하면서 타협된 형태로 최근 타결이 되었다. 이 협정은 지난 11월 16일 이라크 내각에서 통과됐고 26일 이라크 의회에서 투표될 예정이다.
2011년까지 철군?
‘미군의 일시적인 이라크 내 주둔과 그 활동, 철수에 관한 미국과 이라크 정부 간의 협정’(An agreement regarding the temporary U.S. presence in Iraq and its withdrwal from Iraq,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Iraqi government)이라는 긴 이름의 이 협정은 철군시한을 명시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알려졌다. 즉 미군 전투병력은 2009년 6월 말까지 모든 도시에서 바깥으로 물러나고 2011년 말까지 이라크에서 철수한다는 것이다(제22조). 애초 협정안에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시한 연장이나 축소를 요구하면 재검토할 수 있다는 조항과 이라크 병력 훈련과 지원을 위해 필요한 미군의 주둔 연장을 이라크 정부가 요청할 수 있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군의 영구주둔을 위한 근거가 된다는 비판이 커지자 이라크 정부가 요청하여 삭제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연 2011년까지 미군이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할지는 의문이다. 오베이디 이라크 국방장관도 “데드라인 이후에 일부 미군이 필요할 수 있다”며 그 이후의 주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미군의 뮬런 합참의장도 “3년은 긴 시간”이라며 “조건이 변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논의를 계속할 것이다”고 말했으며, 백악관 대변인도 2011년은 ‘희망하는 날짜’라고 했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협정은 미군이 3년 더 주둔하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비난이 거세다. ‘알 사드르 운동’을 이끄는 시아파 지도자 알 사드르는 협정이 이라크의 주권을 미국에 넘겨주는 것이라며 의회통과 거부를 주장하고 시위를 호소했다. 지난 21일에는 바그다드에서 수천 명이 “미국의 협정 반대”, “굴욕협정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점령군과의 협정은 있을 수 없다며 모든 외국군 철수를 주장하는 사드르 세력은 의회에도 275석 가운데 30석을 갖고 있어서 협정의 통과과정에서 의회 내 비판의 선두에 서고 있다.
오바마는 선거공약으로 이라크에서 16개월 내 철군을 제시하였다. 즉 2010년 5월경이다. 그러나 이 약속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또한 완전 철군인지 주둔군을 남겨놓을 것인지 확실치 않다. 미국으로서는 그 동안 철군이 이라크 치안의 안정 여부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라크가 자체적으로 치안을 통제할 수 있게 되더라도 중동에 걸린 막대한 이해관계, 예컨대 이스라엘에 대한 엄호, 석유자원에 대한 접근, 이란과의 핵협상에서 쓸 수 있는 카드 등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이라크 미군 주둔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라크 점령기간 동안 막대한 재정을 들여 건설한 기지들과 각종 시설들도 있다. 수천 억 달러를 쏟아 부은 전쟁에 대해 ‘본전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라크의 주권 존중?
협정 제4조는 이라크에 대한 내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치안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미군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정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라크인들이 미군 주둔과 점령이 이라크 내 폭력의 가장 일차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점령군이 철수하는 것만이 화합의 첫걸음이라고 여기는 것에 비춰보면 완전한 왜곡이다. 또한 군사작전은 이라크 정부의 승인과 협력으로 수행되고 이는 ‘공동군사작전협력위원회’에 의해 감독된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것이 언론에서는 이라크 정부의 허가 없이 군사작전을 못하도록 했다고 보도되었다. 물론 형식적인 효과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조항에서, 국제법이 정하는 대로 각자는 자위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바, 미국이 특정 군사작전을 자위권 발동으로 포장하고 싶으면 그럴 수 있어서 이라크 정부 승인이 얼마나 구속력을 가질 지 알 수 없다. 미국은 이라크 침략도 자위권 행사라고 주장했다.
사법관할권 부분도 큰 문제다. 제21조에서는 공식 임무 수행 중에 발생한 어떠한 손해나 손실, 재산 파괴, 부상과 사망에 대해 각국은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미군이 군사작전 중에 이라크 재산을 파괴하거나 시민을 살해해도 이라크 정부는 보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피해를 입은 제3자가 보상을 요구하더라도 이는 미군 당국에 의해 미국법에 따라 다루게 되어 있어서 제대로 되기 힘들다.
협정에서는 상호 동의한 시설과 지역 외부에서, 근무 중이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나 미국인이 저지른 고의적 중범죄에 대해서만 이라크 정부가 일차적인 사법권을 갖는다고 정하고 있어서 심각한 불평등을 드러내고 있다(제12조). 즉 미군이 영외에서 근무 중이지 않을 때 행한 범죄를 이라크 당국이 처벌하려면 그것이 중대범죄여야 하고 고의성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근무 중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도 미군이 하게 되어 있다. 이는 결국 미군 관련자들에게 광범위한 면책을 부여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석유수출 이익에 대한 통제 지속
협정 제27조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행위로 인해 제기된 (타국의) 요구를 해결하려는 이라크의 노력을 인식하면서 미국 대통령은 그의 권한으로 이라크 계좌, 이라크 발전기금, 기타 자산을 보호해왔다. 미국 정부는 이라크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이러한 보호를 지속할 것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라크 발전기금은 2003년 유엔안보리 1483호 결의안에 의해 생겼는데, 석유와 석유 생산물, 천연가스 수출에서 나오는 이익을 이라크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당시의 미군 임시행정처가 분배하게 했다. 그 이전에 유엔이 이라크를 제재하기 위해 실시했던 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은 2003년에 종료되었다(석유-식량 교환프로그램 하에서 이라크는 석유수출 수익을 식량구입과 같은 인도주의적 구매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행정처는 이라크 발전기금 계좌를 뉴욕연방준비은행에 만들었고 바그다드의 이라크 중앙은행에는 그 일부 액수만을 두었다. 미국이 사실상 계속 그 돈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안보리 1483호 결의는 이 기금이 이라크 재건에 있어 이라크인을 돕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쓰여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무책임과 만연한 부패로 인해 수십억 달러가 새나갔다. 미 국방부가 겉치레로 행한 재건사업의 계약자인 핼리버튼과 같은 다국적기업들에게도 부풀려진 사업비용으로 막대한 돈이 흘러갔다. 이후 석유수입 통제권은 이라크 정부에 넘어갔지만 현재 뉴욕연방준비은행 계좌에 아직 100억 달러가 있다고 한다. 협정이 통과되면 이라크의 돈이 계속 미국의 ‘보호’하에 있게 되는 것이다.
SOFA는 해답이 아니다
이 협정이 이라크 국회에서 통과되기까지는 난관이 많다. 미국과 이라크 정부는 통과를 자신하고 있지만 협정이 국회로 넘어간 이후 논란은 커지고 있으며 원래 24일로 예정되었던 표결도 26일로 연기되었다. 이라크와 미국 정부는 협정 반대세력을 설득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이 SOFA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상 미군의 점령 연장 협정이며 3년간의 기간 동안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다. 무슬림학자연합의 알-파이디 대변인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국민과 정치인들은 협정 거부에 합의했고 이 협정은 강제된 것이므로 체결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이라크 평화를 위한 협정을 제안한 ‘국제 반점령네트워크’의 이라크활동가 알-바야티는 이 협정이 이라크를 영구적 식민지, 주권을 가진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이 협정이 통과되더라도 이라크인들에게 평화와 자유가 올 리는 만무하다. 점령 하에서 평화와 안정,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15만에 이르는 미군과 외국군대의 조건없는 완전한 철수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