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가 고공 행진을 하고 있다. 1999년 1월, 이라크의 증산으로 인한 공급 증대와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수요 둔화가 겹쳐 유가는 배럴당 8달러에 머물렀다(미 서부텍사스 중질유 기준). 그러나 그 이후 유가는 급격히 올라 2000년 9월 배럴당 35달러가 되었다. 2001년 정보기술 산업 거품붕괴로 미국에 경제위기가 도래하자 2001년 말에 유가는 다시 하락하였다가 2004년 9월경에는 배럴당 4-50달러까지 상승하였다. 2007년 9월에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섰고, 같은 해 10월에는 90달러를 넘어서더니 올해 1월 2일에는 100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100달러는 일시적인 정점이라는 견해가 유력했다. 하지만 6월 17일 현재 130달러를 넘고 있고, 최고치를 기록한 6월 6일에는 139.89달러를 기록했다. 물가를 감안한 실질 가격 기준으로는 역사상 가장 유가가 높았던 2차 석유 위기 당시인 1980년의 100-110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에너지 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세계 석유 집약도 감소를 고려한 2차 석유위기 당시의 ‘실질 실효 가격’은 150-160달러가 된다고 한다. 즉 아직은 이 가격에는 못 미친다). 최근의 유가 상승은 그 가파르기가 그지없고 변동성 또한 매우 커 폭등과 폭락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달러 기준 유가는 왜 이렇게 오르고 있는가? 달러 가치 하락 및 금융 투기, 중국, 인도 등에서의 원유 수요 증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들의 원유 소비 증대 등이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그날그날의 유가 변동 이유로는 나이지리아 등지에서의 테러리스트의 송유관 공격, 원유 채굴 노동자 파업, 미국 원유 재고량의 감소,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설 등이 얘기되기도 한다.
우선 달러 가치 하락부터 보자. 달러 가치가 현저히 하락한 현재 달러 기준 유가는 유가 상승 정도를 과장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즉 유로 기준으로 유가는 그렇게까지 오르지 않았다. 또한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금융 기관에 대한 불신이 커져 있는 상황에서 국채나 곡물 원유 등의 상품에 갈 곳 없는 자금이 몰릴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물론 최근에 곡물 등 다른 상품 시장의 거품은 꺼지는데 원유 가격은 계속해서 치솟고 있는 점에서 원유 시장과 다른 상품 시장 사이에 차별화가 진행되고 있기는 하다.
중국, 인도 등지에서의 수요 증대 또한 막대하지만 이들 국가에서의 원유수요를 포함한 세계 원유 수요 증가율은 1994년에서 2006년 사이에 연평균 1.76%에 불과하다. 2003-2004년에 가장 높은 3.4%를 기록하였다. 문제는 이런 정도의 수요 증가에 부응하지 못하는 공급이 문제가 아닐까? 더욱이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공급 확대의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에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유가상승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원유 생산 및 공급 제약이다. 사실 투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투기 거품 이후에 유가가 폭락해서 '정상 가격'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에 기초해 있다. 그런데 석유는 근본적으로 고갈 가능성이 있는 자원이다. 만약 원유 생산량의 정점이 도래했거나 곧 도래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석유는 단기적으로 비슷한 가격의 대체제가 나타나기 힘든 자원이다. 이런 자원에 대한 투기와 고갈 가능성이 없고 일시적으로 공급 제약이 존재하는 상품에 대한 투기와는 성질이 다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원유 생산 및 공급 제약의 문제는 금융 투기를 제한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피크오일(원유 생산 정점)이 도래했는가?
원유 생산 및 공급 제약은 일부 유전들이 생산 정점을 지나 생산량이 줄고 있고 일부 유전의 경우 투자가 진행되지 않아 잉여생산능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산에 조그마한 차질을 가지고 올 사건도 즉각 원유 가격을 밀어 올리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다 뜨거운 쟁점은 원유 생산 정점이 이미 도래했거나 곧 도래할 것이라는 ‘피크오일’론이다. 킹 휴버트가 제시해 1970년대 미국의 원유 생산 정점 시기를 거의 정확히 예측해 유명해진 이 이론은 지금까지는 일부 극단적 비관론자들에게만 수용되다가 최근에는 주류 언론에도 자주 소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원유가 상승의 근본적인 원인이 이것에 기인하지 않는가라는 논의가 활발하다.
비록 가까운 장래는 아닐지라도 원유 생산 정점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원유가 “토지처럼 재생산이 불가능하지만 또 토지와는 달리 고갈 가능성이 높은” 광업자원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피크오일 주창자들의 피크오일 시기는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이미 피크오일 시기가 지났거나 곧 도래한다. 휴버트와 같이 작업했던 디훼이즈(Kenneth S. Deffeyes)는 2005년에, 독일의 에너지워치그룹(EWG)는 2006년에 이미 피크오일에 도달했다고 하고, ‘피크오일 및 피크가스 연구연합회’(ASPO)의 창시자 캠벨(Colin Campbell)은 올해 6월에 발표한 자료에서 2008년을 피크오일의 해라고 예측하고 있다(캠벨은 새로운 자료를 반영하여 피크오일 시기를 변경해가고 있는데 2011, 2010, 2007, 2008로 바뀌고 있으나 2010년 전후로 피크오일 시기를 예측하고 있다. 캠벨은 1990년대 중반에 2000년을 피크오일 시기로 예측한 바 있다). 그리고 사우디 및 중동의 원유생산을 연구한 시몬스(Matthew Simmons)도 대체로 지금 시기를 피크오일 시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고로 2005년, 2006년, 2007년의 원유 생산량은 1일 평균 약 8,500만 배럴로 거의 동일하고, 2008년 1/4분기만을 보면 생산량은 2005-2007년에 비해 조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거대 석유기업 등에서도 “값싼 원유 시기는 지나갔다”며 피크오일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피크오일 주창자들과 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원유 매장량에 대한 판단의 차이, 앞으로 발견될 원유량의 차이, 오일 샌드 등 비전통적인 원유에 대한 판단의 차이 등에 있다. 피크오일 주창자들은 각국이 발표하는 매장량, 특히 OPEC 회원국들이 원유 생산 쿼터를 많이 할당받기 위해 부풀려온 매장량을 불신하고 대신 생산량, 원유 발견량, 원유 채굴량 등에 기초해 독자적으로 매장량을 판단하고 피크오일 시기를 산정한다.
피크오일 이후 원유 생산량이 어떤 궤적을 그릴지도 논란거리이다. 급격히 하강하느냐 고원 형태를 보일 것이냐가 문제다. 별 준비 없이 전자의 사태를 맞이하면 석유 문명은 공황, 전쟁 등 급격한 혼란을 겪을 것이다. 후자라 할지라도 석유문명의 전환은 불가피하고 그래도 전자보다는 혼란이나 고통이 덜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현재의 고유가가 가까운 장래에 피크오일의 도래에서 연유한 것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원유 생산 및 공급의 제약이 어느 정도 뚜렷해 보여, 중국 인도를 포함한 전 세계의 경제위기가 아니라면 고유가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피크오일 지지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과 기관들이 이러한 예측에 영향을 받아 고유가를 예상하고 있다. 투자회사 모건 스탠리에서는 원유가가 곧 150달러에 달할 것이라 발표를 했고, 골드만 삭스는 그 보다 먼저 향후 6개월에서 2년 사이에 원유가가 200달러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보다 극적인 사례로는 CERA(Cambridge Energy Research Associates)가 있다. 2008년의 유가폭등이 있기 전까지 CERA 의장 다니엘 예르긴(Daniel Yergin)은 피크오일 주창자들을 비판해 왔고, 유가가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 5월 7일에 2008년 중 유가가 150달러에 이를 것이고, 이는 공급 제약 때문이라고 기존 견해를 뒤집었다.
고유가와 한국 경제
고유가는 한국 경제에 커다란 부담이다. 당장 화물연대 등 운수 종사자들의 파업을 낳고 있다. 치솟은 경유 가격에 비해 운송료가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는 항공업계와 자동차업계가 타격을 받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곡물 가격 상승 또한 유가 상승과 무관하지 않다. 화학비료 생산, 기계영농에 원유가 필수적이고 이는 곡물 가격을 상승시키고 있다. 높은 가격의 원유에 대한 대체제로 바이오연료 생산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양의 곡물이 쓰이고 있다.
고유가는 이렇게 개별 산업에의 영향 이전에 물가나 경상수지 등 거시 변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의 물가 상승은 고유가가 주요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고유가는 경상수지를 악화시키고 있다. 원유 수입액은 올해 1월에서 4월까지의 합계액를 보면 수입총액의 18.8%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전년 동기의 15.2%보다 3.6%포인트가 늘어난 것이다(참고로 곡물수입액이 총수입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에 1.7%였다). 2007년 1월에서 4월까지의 원유수입액이 약 170억 달러인 반면 2008년 원유수입액은 약 270억 달러로, 올해 4월까지만 전년 대비 약 100억 달러의 추가부담이 있었다. 이 대부분이 가격 상승으로 인한 추가 부담이었다. 4월까지의 경상수지 적자가 약 68억 달러임을 감안하면 유가 상승으로 인한 부담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고유가가 지속되고 이로 인한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된다면 이는 자칫 초민족적 금융투기자본의 급속한 이탈을 낳고 이는 환율 위기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현재 정도의 경상수지 적자만으로 이런 문제가 야기될 것은 아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막대한 규모의 금융투기자본이나 단기 외채의 존재로 인해 적은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로도 쉽게 환율 위기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국제투자수지 마이너스 규모는 최근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
고유가는, 특히 이것이 피크오일에서 기인한다면, 이런 단기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중장기적으로 보다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석유에 기댄 산업 및 소비생활 전반에 대해 대대적인 전환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재의 고유가로 인한 문제를 전부 이명박에게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명박을 비롯한 지배세력이 이런 문제에 올바로 대처할 수는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특히 금융세계화된 현실에서 국제적 환율의 변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석유 가격의 급변은 그 자체로 경제에 큰 위기 요소다. 우리는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이 경제성장 또는 효율이라는 미명하에 주권이나 안전, 생명, 건강, 민주주의, 노동권 등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들이 경제위기, 생태위기나 문명의 전환 등에 대한 그 어떠한 개념이나 대책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