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코'보다 나은 현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에서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서명이 1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국 보건의료의 현실을 풍자한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sicko)도 큰 관심을 끌며 공동체 상영으로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여론의 압박에 부담이 되었는지 이명박 정권은 4월 29일 건강보험의 당연지정제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는 안도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은 여전히 영리병원 허용과 민간의료보험 활성화(의료보험 민영화)로 대표되는 의료산업육성으로 미국의 비극적인 현실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또는 조세 기반의 국가건강서비스)이 없는 미국은 4인 가족 건강보험료가 월 평균 200만원인 나라, 15일 독감입원비가 4,500만원인 나라, 병원비로 파산하는 사람이 연간 200만 명인 나라다. 미국인의 16%에 해당하는 4천 7백만 명이 아무런 의료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약 2천만 명은 급여가 불충분한 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1억 8백만 명은 치과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의료비가 국내총생산(GDP)의 15.3%를 차지해 OECD 국가 중 최저 6%인 한국은 물론, OECD 평균인 9%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미국은 OECD 30개 국가 중 기대수명 23위, 영아사망률은 7위로 매우 나쁜편이다. (둘 다 한국이 더 낫다.)
미국의 현실이 이러한데 미국 민중들의 불만이 어떻게 관리될 수 있을까? 폭동이라도 일어나야 하지 않나? 미국도 공공병원, 지역보건센터, 비영리병원의 자선진료, 응급실 진료 등으로 보험 미적용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을 갖추고 있다. 65세 이상의 노인과 장애인에게는 메디케어로, 저소득층에게는 메디케이드로 정부가 최소한의 의료보장을 제공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러한 의료보험제도는 잔여주의적 접근으로 전 국민에게 보편적인 건강을 보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미국의 보건의료체계는 비용은 많이 들지만 효과는 미미하고, 불평등은 극심하다.
그렇다면 한국 보건의료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국 의료비의 개인부담률은 38%로 OECD 평균 20%의 2배이다. 국민의료 중 공적재원의 비중은 53%로 OECD 평균 72.5%에 크게 못 미친다. 개인부담률(또는 본인부담률)은 보험금을 내고도 진료를 받을 때 총 진료비의 일부를 환자가 직접 지불하는 금액의 비율이다.(즉 진료 시 환자가 병원이나 약국에 직접 납부하는 돈의 비율이다.) 우리는 보험료를 내고도 의료비의 40%를 병원에 직접 납부해야하기 때문에 고액중증질환에 걸리거나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 환자와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이 어마어마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의료비 본인부담 상한제를 실시한다. 유럽은 연 30~50만원 수준이고 대만도 연 160만원 이상의 의료비는 정부가 책임을 진다. 한국도 6개월간 200만원 이상에 대해서는 본인부담 상한제를 실시하고 있으나 보험적용 항목에 제한되어 있다. 고액중증환자들은 특히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고액검사와 약, 병실료 차액 등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따라서 고액중증환자들의 개인부담률은 60%수준까지 올라가는데 이 중에서 20-30% 수준인 보험적용 항목에 대한 법정본인 부담금에 대해서만 상한제가 인정되기 때문에 나머지 비급여 부분은 고스란히 환자가 부담해야한다.
민간의료보험 확대와 우울한 미래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큰 병에 걸렸을 때를 걱정하여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다. 암보험이니 다보장보험이니 하는 것들이다. 97년 1조원에 불과하던 민간의료보험이 이제는 8~10조원으로 불어나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30~40%에 이른다. 민간의료보험의 보험수입료는 97년 생명보험사 총 보험수입료 중 3.1%에 불과했으나 2003년에는 17%로 증가하여 연평균 45%씩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외국계 보험자본이 대거 진출하여 경쟁이 심화되고, 전체 가구의 60%이상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할 정도로 시장이 포화되었다. 따라서 보험자본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개인이 부담하는 치료비를 대상으로 하는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을 도입하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액형 민간의료보험은 암이면 얼마, 골절이면 얼마 하는 식으로 해당 질병의 발병 여부에 따라 실제 치료비용과 관계없이 일정금액을 지급한다. 반면에 실손형은 국민건강보험에서 지급되지 않는 개인부담금의 전부나 일부를 보상하는 보험이다.
사실 의료산업화와 실손형 보험 허용은 노무현 정권이 도입한 것으로 이명박 정권의 정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추진 의지를 더 강하게 표명하며 노골화한 것이다. 지난 5월 4일 삼성생명은 업계 최초로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개인대상 실손형 민간의료보험 상품인가를 받았다. 교보생명, 대한생명 등도 상품심사 중이다. 민간의료보험 확대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분명”해보이기 때문에 아직 제도가 완전하지 않지만 시험적으로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이 확대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개인부담금을 돌려받는 실손형 보험은 보험료 외에 추가적인 비용부담이 없거나 작기 때문에 과도한 의료이용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보험자본도 의료지출이 늘어날 경우 자신의 이윤이 감소하기 때문에 과도한 의료비용 지출을 제어할 심사기준 등 갖은 방법을 마련할 것이다. 따라서 환자의 개인병력과 건강정보가 중요하다. 지금 보험자본은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가지고 있는 개인 질병정보를 사기업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의 행위별수가제도와 규제되지 않는 의료전달체계(병원, 요양기관 등)를 그대로 두고 실손형 보험이 확대되면 국민건강보험의 지출이 늘어 재정의 적자 규모를 키울 것이다. 보험료 인상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크고, 정부가 민간의료보험의 몫을 적극적으로 확대시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국민건강보험 재정적자는 보험의 보장성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조절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들은 '불만족스러운' 국민건강보험에 돈을 더 내기보다 개인적으로 민간의료보험을 선택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따라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악화되고, 보편적인 국민건강보험에 대한 유인이 사라진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고액-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은 낮은 보장성과 높은 개인부담금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 시나리오는 국민건강보험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이 확대될 경우 발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국민건강보험의 실질적 기능이 축소됨에 따라 이중형(병렬형)이나 대체형(경쟁형) 의료보험제도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민간의료보험의 유형을 보충형, 이중형, 대체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공적의료보장의 본인부담금이나 비급여에 대한 민간의료보험만 허용되는 것이 '보충형'이다. 공적의료보장 제도가 있으나 공적의료보장의 급여항목도 민간의료보험을 판매하는 경우가 '이중형'이다. 공적의료보장과 민간의료보험이 경쟁하고 선택 가입할 수 있는 것은 '대체형'이다. 한국의 민영의료보험은 비급여 이외의 항목도 보장하나, 모든 병원이 국민건강보험의에강제가입되는 당연지정제 때문에 이중형이 아니라 보충형에 가깝다. 보험자본은 병원과의 독자적인 계약 및 유인알선행위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지정제 폐지를 요구한다.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국민건강보험의 단일보험자체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우려된다. 인수위는 “국민건강보험은 향후 치료 가능한 질병의 의료비용을 중점적으로 담당하고, 그 외의 비용을 담당할 민간 재원을 발굴해 보완적 관계로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민건강보험은 기초적인 질병만 보장하고 나머지는 민간보험을 확대하겠다는 안으로 당연지정제까지 폐지해 이중형 의료보험제도를 추진하겠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일단 국민건강보험 중심의 제도가 무너지고 자본의 이해가 개입한다면, 국민건강보험과 민간의료보험 중 선택가입하는 대체형(경쟁형) 의료보험제도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보험자본뿐만 아니라 금융자본 전체가 계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다.
한편 이명박 정권 일각과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네덜란드형 의료보험제도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내부적으로 네덜란드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하나 이후에 어떤 형태로 재등장할지 모른다.) 네덜란드는 삼중(3층)의 다소 독특한 의료보험제도를 가지고 있다. 먼저 1층은 모든 네덜란드 거주민이 가입하는 '특별의료비지출제도'로 중증질환, 만성질환, 장기요양서비스를 제공한다. 2층은 전 국민에게 의료보장을 제공하는데, 일정 소득선 이하의 국민들은 공적의료보험에 가입하고 나머지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다. 마지막으로 3층은 2층의 의료보험을 보충하는 민간의료보험이다. 2006년에 2층 부문이 소득에 따라 공적의료보험과 민간을 구분하던 장벽을 없애고,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공적의료보험과 민간의료보험이 경쟁하도록 변했지만 기본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네덜란드형 의료보험제도는 국가의 관리를 통해 의료를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 운영은 민간에게 맡긴다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한국이 특히 취약한 중증질환과 장기요양은 국가가 철저하게 책임을 지고(1층), 민간의료보험도 국가가 철저히 규제하고 관리한다. 또 민간보험도 비영리법인이 상당히 존재하며 정부가 강력히 통제하기 때문에 한국의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을 네덜란드 식으로 바꾸자는 것은 국민건강보험의 단일보험자체계를 다보험자체계로 전환하자는 것으로 근본적인 변화이다. 특히 민간의료보험에 대한 규제가 부재하고 병원 등 요양기관의 90%이상이 민영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방향은 그나마 한국 보건의료의 제어판인 국민건강보험과 당연지정제를 무너뜨릴 것이다.
자본에 종속되는 우리의 건강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의 도입이든, 네덜란드형이든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건강에 대한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가 파괴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보건의료도 금융자본의 논리에 종속되고 있다. 보건의료제도 전반에 금융자본이 개입한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이다. 미국인의 절반 이상이 국민건강보험의 도입을 찬성하지만 번번이 제도 개혁에 실패하는 이유는 막강한 보험자본의 힘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보건조직(HMO) 방식의 관리의료는 1980년대 중반 이후(특히 1990년대 클린턴의 의료개혁이 실패한 후) 의료비지출의 급격한 증가에 대한 대안으로 확산되었다. 관리의료는 하나의 조직에 보험-전달-지급이 통합하는데 이 전체를 통제하는 것은 민간보험(금융자본)이다. 민간보험은 비용절감, 즉 이윤확대를 최우선의 과제로 하기 때문에 보험회사가 의료과정에 개입해 비용절감을 주도하고 비용부담은 병원에게 전가한다. 병원과 의사는 보험회사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보험자본의 의료비절감 압력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의 보건의료는 금융자본의 이익에 종속되었다. 또 미국 내 관리의료조직 사이에 경쟁이 격화되자 미국의 보험자본은 관리의료를 수출했다. 199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금융위기를 계기로 초민족자본은 현지의 보험자본을 인수하거나 합자회사를 설립했다. 그 과정에서 해당 국가의 정부와 협정을 통해 그 지역의 의료체제에 개입했다.
여기에 세계무역기구(WTO)의 서비스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S)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협정은 보건의료서비스를 포함하는 공적 서비스를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해 자유무역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건의료서비스의 사유화와 탈규제를 강화하고 자본에게 새로운 시장을 제공하게 되었다. 물론 협정 내 보건의료에 관한 일부 예외조항이 있으나 모호하고 협소하다. 논란이 생겼을 때는 세계무역기구 내의 배심원들에 의해서 판단이 되는데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으로 보건의료서비스에 보험자본이 진출하자 이용자의 지불능력에 따라 서비스가 차별화되면서 건강불평등이 확산된다.
예외적으로 한국은 1980년대 말 이후 경제성장과 민주화로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이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보건의료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이 진행되었다. 현대아산병원(1989년 설립), 삼성의료원(1994년 설립) 등 재벌의 병원업 진출이 1990년대 본격화되었다. 재벌의 대형병원 설립은 한국의 병원운영을 뒤흔들었는데 유치 환자에 따라 의사의 임금이 차등 지급되고, 서비스 정신이 강조되고, 상시적인 평가를 강요하는 등 노동과정 통제가 강화되었다. 병원 필수시설 중 급식, 시설관리, 구급차부터 외주화되고 비정규직이 확대되었다. 또 고급병상과 고가의료장비로 의료서비스의 차등화를 추구하고, 병상확보 경쟁으로 급여시설(1-2-3차 병원) 사이의 분업이 완전히 망가졌다. 2007~2008년에만 삼성의료원, 현대아산병원이 병상을 각각 1,000개씩 늘렸다. 중소병원이나 지역대형병원의 경영난이 가중되고 있고, 이화여대 동대문 병원이 문을 닫아야 될 정도다. IMF이후에는 국립의료원과 공공병원이 대거 민영화되어 공공병원이 8%, 병상 기준으로는 15%가 안 된다. 미국 33%는 물론 OECD 평균 75%와 큰 차이다. 이제 정부는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영리병원도 허용하려고 하고 있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장한 민간의료보험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30~40%를 차지할 만큼 성장했으며, 이제 자신의 새로운 몫을 위해 한국의 의료보험제도 자체를 바꾸려 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이 있는 한국에서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이 도입된다고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보험자본과 정부의 변명이다. 하지만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이 도입되면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가 보험자본의 이해와 직접적으로 상충된다. 따라서 보험자본의 입장에서는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를 막는 것이 이윤의 보장성을 확대하는 길이다. 보건의료의 문제가 곧바로 자본의 이해와 연결되는 것이다. 실손형 보험이 확대된다면 지금도 의료산업화 논리로 정부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금융자본의 힘이 더 강화될 것이 명백하다. 국내 1위의 보험자본인 삼성생명이 밝힌 민영의료보험의 발전단계에 따르면 실손형은 “병원과 연계된 부분 경쟁형”으로 나아가는 한 단계이다. (그림1 참고.) 그 최종목표는 “정부보험을 대체하는 포괄적 보험”이다. 즉 미국식 민간의료보험 체계를 만드는 것이 보험자본의 목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 2007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의료서비스산업 고도화의 과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의료산업화의 과제로 ①영리병원 허용, ②당연지정제 폐지, ③민영의료보험 활성화를 제시했다. 이는 올해 3월 10일 기획재정부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경제운용계획”의 의료서비스규제완화와 일치한다.
그림1. “민영건강보험의 현황과 발전방향”(2004), 삼성생명자료.
(오른쪽 상단에 삼성생명로고가 선명하다. “현재 4단계까지 일부 실행된 상태”이고, 문제는 4단계를 확대하고 5, 6단계로 넘어가는 일이다!)
즉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의료산업화와 그 대표 주자인 의료보험 민영화는 재벌과 이명박 정권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그 첨병인 금융자본의 이해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길은 보편적인 국민건강보험을 망가뜨리고, 의료의 시장화를 부추겨 건강하게 살 민중의 권리를 송두리째 앗아갈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변화의 결정권을 자본측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과 이명박 정권의 결탁은 조만간 추진될 공기업 사유화 공세에서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여기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운동을 형성하는 것. 이것이 의료보험 민영화를 막고 우리의 건강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보론] 적정모델의 재등장을 경계한다.
신자유주의적 보건의료 개혁에 맞서는 운동의 태세를 생각해보자. 이명박 정권의 의료보험 민영화에 대중의 반발이 상당하다. 하지만 운동은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아직 합의된 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식코 보기”나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라는 구호 외에 구체적인 운동의 목표와 계획은 무엇이어야 하나? 지난 4월 25일 “이명박 정부 공공부문 사유화에 대한 대응방안 토론회”에서 정태인 씨는 ‘6만 원 내기 운동’을 제안했다. 국민들이 1인당 약 6만 원씩 내는 민간보험료을 국민건강보험료로 내면 무상의료를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보험회사와 대형병원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정부가 못 받아들일 텐데 그러면 왜 못 받느냐는 식으로 문제제기하고, 실제 6만 원 씩 모으는 방법도 가능하고, 건강보험 100%를 보장하라는 압박을 가하면서 대형병원과의 결탁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같은 자리에서 오건호 씨는 정태인의 의견에 동의하고 “이명박 정부의 건강보험 악화에 맞서야하지만 대안 설정 의제가 중요하다. … 우리 노동자가 보험료를 더 내자고 하는 화두를 전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2000년 시민운동 진영에서 주장하던 국민건강보험을 적정부담-적정급여-적정수가 체계로 개혁해야한다는 '적정모형'의 새로운 판본으로 보인다(무상의료 판 적정모형). 적정모형은 현행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저부담-저급여-저수가인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부적절한 국민건강보험 설계가 국민의 건강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낳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부담-급여-수가 세 측면이 상호 악영향을 끼치면서 문제를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향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의 적정한 부담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기업과 노동자가 보험료를 50대 50 부담하는 한국은 예외적인 사례다. 기업부담 몫은 일본 56.4%, 프랑스 65.3%, 대만 60%다. 또 대만은 정부가 10%를 부담해 노동자가 실제 30%만 부담한다. 수치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 보건의료의 문제는 보험제도나 보험료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다. 요양기관(병원, 보건소, 장기요양 시설) 등 의료전달체계가 시장에 장악되어 왜곡되어 있고, 병원자본, 제약자본과 보험자본의 이해가 과대 대표되고 있다. 여기에 의사, 약사 등 직능집단의 이해관계와 행위별수가제도 등 의료행위를 왜곡하는 각종 제도문제가 복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계가 있다. 따라서 자본과 이명박 정권도 영리병원 허용, 당연지정제 폐지, 의료보험 민영화를 한 묶음으로 다루었으며, 이것을 실현할 세부적인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지금은 여론에 떠밀려 당연지정제 폐지를 부인했지만, 근본적인 사회관계의 변화가 없으면 신자유주의적 의료시장화를 추구하는 정책방향을 고수할 것이다. 다만 때를 기다려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방법을 찾을 뿐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구조화된 현실에서 보험료 중 노동자의 몫을 자발적으로 인상하는 운동으로 이니셔티브를 쥐고 무상의료를 달성하자는 것이 가능할까. 국민들은 이미 보험료를 조금 더 낸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합리한 보건의료 관행, 병원과 제약회사, 의사, 약사들의 결탁, 국가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경험한 것이다. 건강보험료 인상에 반발하는 국민들은 이미 6만원 더 낸다고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와 운동이 어떻게 발전해야하는 지에 대한 상이 다르다. 보건의료나 사회복지는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는 사회의 여러 부문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 영역이 독자적이지 않기 때문에 변화를 이루는 방법이 좋은 정책설계, 여론과 미디어 활용, 선거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문제는 현실의 계급관계다.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상층의 합의나 좋은 정책선전이 아니라 계급관계의 변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