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의 주간지 사회와노동

이주노동자들의 단결과 저항의 권리를 옹호하자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 없이 신자유주의를 넘어 설 수 없다

누가 정부에게 인권탄압을 합법화할 권력을 주었단 말인가

지난 12월 10일은 1948년 국제연합(UN)에서『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꼭 60 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12월 18일은, 1990년 UN 총회에서 회원국 만장일치로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보호를 위한 협약(이주민 협약)이 통과된 것을 기념하는 세계 이주민의 날이기도 하다. 현 UN 사무총장 반기문은 세계인권선언에 담긴 기본적 자유가 아직까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며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이를 누릴 수 있도록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노력해 달라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UN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서 적어도 입에 발린 소리라도 한국 정부가 앞장서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얘기가 나올 법한 시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은 어느 때보다 처참한 지경이다. 지난 11월 27일, 정부는 서울 경인지역 이주노조 까지만 위원장, 라쥬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 3인을 표적단속했고, 12월 13일 새벽에는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강제추방했다. 이에 앞서 지난 11월 8일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법 개악안을 입법 예고했는데, 그 핵심 중 하나는 그동안 많은 비판을 받았던 인간사냥 식 단속을 영장 없는 단속 및 자의적 불심 검문의 합법화 등을 통해 법률로 한층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견해에 따른 탄압을 비판하자 국가보안법을 입법하는 것으로 대응하는 격의, 실로 파렴치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각계의 빗발치는 비판에 대해 법무부는, ‘주권국가’의 ‘합법적인 행정권 행사’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모든 비판 앞에서 ‘법은 법’이라는 주문을 되뇌이는 저들은,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잔혹 중 하나였던 유태인 학살이 철저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 집행자 중 한 명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자신은 국가가 합법적으로 부과한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므로 무죄라고 스스로를 변론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사고(思考)와 저항 없이 법에게 바치는 절대적 복종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악의 뿌리라는 것을, 우리는 저 합법적 폭력 앞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인권의 핵심은 ‘권리를 가질 권리’다

‘세계 인권의 날’ 3일 후, UN 사무총장 배출국 정부에 의해 해외로 추방된 3인의 이주노조 활동가를 보면서, 인권이란 아무런 현실적 힘을 갖지 못하는 허구적 이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빠져드는 것은 우리만은 아니리라. 이미 『세계인권선언』이 발표된 당대에, 인권이란 완전한 허구이며 아무런 현실적 힘도 갖지 못한다는 매서운 비판이 쏟아진 바 있고, 이는 인권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을 괴롭힌 난제였다.
그렇다면 인권 이념 자체가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볼 때 문제는 공적·정치적 차원에 선행하는 사적 개인의 ‘천부(天賦) 인권’이 있다는 근대 자유주의 자연권 이론에서 유래한 관념이다. 그러나 권리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입증되는 것처럼, 하늘이 부여한 본성이라거나 사적 개인이 선천적으로 보유하는 속성이 아니라, 정치적 공동체를 함께 구성하는 동료 시민들이 서로에게 부여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권리, 정치적 공동체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지 않는 인권은 아무런 실효성을 가질 수 없다. 인권의 핵심은 ‘권리를 가질 권리’, 권리를 주장하고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권리, 곧 ‘정치에 대한 권리’인 것이다.
정치에 대한 권리는 한편으로 정치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다. 이 때 핵심이 되는 것은 자신들의 결사를 조직하거나 대표를 선출하고, 그 발언과 권한을 공적 공간에서 보장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공동체를 지배와 폭력의 구조가 떠받치고 있다면, 단순한 참여만으로는 모든 이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공동체의 구조적 불의에 맞서고 공동체를 바꾸어 내는 저항의 권리가 중요하다. 이 같은 이중의 의미에서의 정치에 대한 권리를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인권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구조적 불의를 감추기 위한 분장이 될 뿐이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정확히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목격한다. 아무리 인권을 말한들, 노동조합이라는 이주노동자들의 자주적 결사체를 탄압하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의 기초 자체를 파괴하는 것일 따름이다. 법무부는 이주노조 3인 활동가가 출입국관리법 제 17조 ‘정치활동 금지’규정을 위반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 이라크 파병반대 등 국내의 정치적 시위활동에도 가담’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이렇듯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 민중들과 함께 저항할 권리, 이를 통해 능동적 시민, 국적을 넘어서는 집단적 주체로 일떠설 권리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사적·원자적 개인으로 머물기를 강요하며, 마지못해 결사의 권리를 인정하더라도 구조적 불의에 맞서 저항하는 능동적 시민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시혜에 몸 둘 바 몰라 하는 수동적 신민(臣民)이 되기를 강제한다. 정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 대가로 주어지는 부스러기 권리, 그것이 저들이 말하는 인권의 내용이다. 그러나 인권의 역사는, 인권의 본질적 일부가 파괴되면 인권 전체가 파괴된다는 것, 또 인권은 단 한 번도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 적이 없고 항상 대중들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되었다는 점을 증언한다.

이주노동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신자유주의

오늘날 이주 문제가 세계적으로 부상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와 직결되어 있다. 발전주의가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 세계의 절반을 자본주의 안으로 포섭하려는 기획이었다면,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더 이상 외부가 없는 세계시장 안에서 내부적 배제를 조직하는 기획이다. 중심부로 모든 종류의 자원이 이탈·집중되고, 주변부는 버려지거나,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재생산의 토대를 파괴하는 금융적 강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주변부 경제가 파괴되면서 막대한 ‘경제적 난민’들이 발생하게 되고, 이들은 생존을 위해, 또는 자국 경제의 재건을 위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심부로 이주한다.
동아시아 역시 이 같은 일반적 경향에서 예외가 아니다. 본래 동아시아는 노동력이 자본을 찾아 이주하는 유럽 등과 달리 자본이 노동력을 찾아 이동했기 때문에 최근까지 이주 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대표적 조치 중 하나인 ‘역플라자 협약’을 전후하여 일본 자본을 비롯한 해외 자본이 더 이상 동남아시아에 투자하지 않고, 또 엔저 현상으로 일본 상품에 대한 가격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동남아시아 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고, 이는 90년대 중반 동아시아 금융위기로 이어진다. 동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역들은 신자유주의 재편 속에서 배제되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바닥으로의 경쟁’에 내몰린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해외 한국 기업의 악명 높은 노동 착취에서 보듯, 극단적 폭력을 동반하는 착취의 강화이고, 그나마 대부분은 생산을 동반하지 않거나 심지어 파괴하는 금융적 투기이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로의 편입을 가속화하는 중국 안에서 배제되는 농촌 출신 민중들이 이주 대열에 합류한다. 이런 식으로 발생한 ‘경제적 난민’이 동아시아 차원의 이주를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이주의 문제는 일국적 차원이 아닌, (동아시아 경제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최소한 동아시아 차원의 사고와 실천을 필요로 한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안에서 상대적으로 ‘중심부’의 지위를 점하는 국가와 자본은 이 같은 동아시아 내 ‘주변부’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현재의 민족국가 체계 안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권리가 구조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제하기 쉬울뿐더러, 이들을 ‘산업예비군’으로 활용해 국내의 정주(定住)노동자들을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가 단결할 경우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민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단결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이 지배계급에 의해 ‘산업예비군’으로 활용되는 한에서 곧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활용되는 한에서, 이들을 적대하곤 한다.
물론 이는 지배계급에게 더 큰 이익을 안겨 준다. 대중들의 지지에 기초하여 이주노동자들을 무권리 나아가 불법 상태에 머물게 만듦으로써, 이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을 통제함으로써 정주노동자 및 민중들 역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내국 노동자 및 민중에게도 예외가 아닌 권리 파괴에 대한 불만을 다소간 무마할 수 있다(‘그래도 우리는 저들보다는 낫다.’). 즉 권리를 전체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권리를 악화시킴으로써 나머지 집단들에게 허구적인 안도감을 자아내는 것이다. 또한 특히 ‘불법’ 상태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경찰적 탄압을 통해 정주노동자 및 민중들에게 간접적인 경고를 보낼 수 있다(‘우리도 잘못하면 저들처럼 될 수 있다.’). 이처럼 법에 대한 도전이라는 위험을 필연적으로 포함할 수밖에 없는 저항에 대한 공포를 체계적으로 조장함으로써, 결국 정주노동자들의 권리의 토대 역시 파괴되는 것이다.

  2007 세계이주민의 날 집회 모습(출처 : 참세상)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는 대안세계화의 중요한 경로

사태가 이렇다면, 이주노동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만일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안정을 해치는 ‘적’으로서 이주노동자들과 만난다면, 노동자·민중운동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이 ‘적’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국가와 지배계급은 우리의 ‘보호자’가 될 것이므로, 국가에 한층 더 종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 민중들을 적대하거나, 이들에 대한 국가의 탄압을 묵인하는 한에서 한국의 대중운동은 동아시아 차원의 운동을 도모할 가능성과 정당성을 잃게 될 것이고, 이 같은 대중운동을 ‘집단이기주의’로 비난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을 시혜적으로 원조하고 관리하는 NGO들이 도덕적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반대로 공동의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에 함께 하는 동료들로 만난다면, 한국의 운동은 많은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주노동자와 정주노동자가 공동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연대한다면,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지위 및 정주노동자들과의 분열을 활용하여 정주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지배계급의 전략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또 이 공동의 투쟁과 연대를 통해서 한국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주체와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국적 차원의 접근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변혁을, 동아시아 차원에서 함께 토론하고 실행할 수 있는 동료들을 얻게 됨으로써, 한국의 운동이 더욱 확장된 시야와 토대를 얻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주노동자들과의 토론을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의 신자유주의 재편의 쟁점 및 투쟁 과제를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뿐더러, 대안세계화 운동을 동아시아 곳곳에서 서로 연결하고 지역적․대중적으로 함께 건설할 수 있는 현실적 주체들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개별 국가를 넘어서는 초민족적 사회운동이 통일성을 갖는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할 때에만, 사회운동은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을 통제할 수 있고, 그래야만 확대된 이동성을 무기로 자본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재편한 개별 국가의 세력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대안세계화의 전망은 동아시아 노동자 민중들의 연대 없이 이루어질 수 없고, 이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동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주노동자들과의 연대는 우리보다 열악한 지위에 있는 이들을 돕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 차원의 새로운 운동을 열어가는 가장 힘 있는 운동인 것이다.
이주노조를 함께 지켜내자. 이주노동자와 함께 공동의 노동권과 인권을 쟁취하자. 동아시아 노동자 민중의 더욱 굳건한 연대로 이윤추구에 혈안이 된 자본을 통제하고 다른 세계를 함께 건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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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 이주노동자 , 이주 , 대안세계화 , 이주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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