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문>의 내용을 두고, 통일운동진영은 이번 선언문이 2000년 6.15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환영하면서도 획기적인 통일 방안이나 통일기구구성계획이 담겨있지 않았다고 문제제기 했다.
누가 보아도 10.4 선언 중 가장 두드러진 ‘진전사항’은 바로 제5항, “경협사업의 활성화 방안”이다. 이는 2000년 이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같은 실험적 차원의 경협을 뛰어넘어, 남한 정부차원에서의 중장기적인 ‘남북 경제통합구상’의 의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 동안 남한의 대북지원 및 경협사업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보유선언, 핵실험으로 이어져 온 강도 높은 긴장의 국면마다 중단되거나 이주 미약하게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2007년 이후 7년 동안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벌어졌던 군사적 긴장과 갈등을 뛰어넘을 만큼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사업 구상을 다뤘다.
6자회담을 통한 북핵문제해결의 실현가능성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분단 57년의 역사를 종식시키자는 합의가 이루어진 이번 회담에서,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의 문제에 앞서 경협의 실효성과 수익성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양상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상회담 직후, 부시는 노무현과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한미정상회담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고 치하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곧 미국이 생각하기에 10.4선언은 한미동맹의 우위가 관철되는 하에서 남한이 주도하는 경제통합을 실현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향성이 곧 남북관계 진전의 ‘올바른 방향’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못 박고자 했던 것이다. 통일운동진영의 지적과 다르게 <10.4 선언>은 오히려 미국의 강력한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남한이 주도하는 ‘경제통합’을 하나의 ‘통일’의 윤곽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정표다.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오고 있는가
9월 말, 6자회담 2.13합의의 2단계 조치가 합의되고, 부시가 임기 내에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약속하는 등 현재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분명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근거로 들어, 미국이 쉽게 뒤집기 어려운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북미간의 평화협정체결에 있어 반미자주통일의 전략적 목표가 관철될 수 있는 “올바른 평화협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호기”라고 말하기도 한다.
2006년 초에 알려진 ‘젤리코 보고서’는 “한반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과감한 접근법으로 북핵 문제 해결에 그치지 말고 곧 이어 동북아 냉전구조를 해체하자.”라고 주장하며 북한의 핵폐기 이외에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에너지 및 경제지원, 북미관계정상화, 평화협정체결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또한 올해 4월에 발표된 ‘한반도 및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프레임워크’(대서양위원회, Atlantic Council)는 미국의 초당적 한반도 전문가그룹이 제출한 보고서로서 2008년까지 북-미관계 정상화를 촉구하고 현행 한반도 정전협정을 대체할 평화협정 체결 등 ‘5대 평화체제’ (△비핵화 협정 △정전협정을 대체할 남·북-미-중 4자 협정 △북-미 협정 △군사적 신뢰구축 및 병력 재배치와 관련한 남·북-미 3자 협정 △동북아 안보협력기구 창설 관련 6자(남-북-미-중-일본-러시아) 협정)를 꾸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한미동맹의 차원에서는 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SPI)를 통해 남북관계를 화해협력단계(2005~2010년)와 평화공존단계(2011~2025)로 나누고 평화공존단계에서는 통일을 지향하는 과도단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렇게 알려진 ‘한반도 평화협정체결’의 흐름은 작년 11월 하노이와 9월 시드니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가 직접 내뱉은 북핵 폐기 후 평화협정을 체결 약속, 그리고 이번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나온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3자, 또는 4자가 종전을 선언한다는 약속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미국은 북-미간의 일정한 협상 틀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형태를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움직임이 한반도의 ‘평화체제구축’이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북한 핵무기의 ‘불능화’와 핵폐기 협상이 완료되는 것을 전제로 미국은 북한이 요구해온 일정수준의 체제 보장을 약속하고 남한은 경제지원과 대북투자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킨다는 구상! 물론 이것이 2008년까지 무사히(?) 실현될 수 있을 지의 여부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측면에서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실현가능성을 따지기에 앞서 한국과 미국이 공동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항구적인 평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평화협정”이 보증할 수 있는 것
‘한반도 평화협정’은 그 자체로 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나 92년 <남북기본합의서>, 또는 94년 <북-미 제네바 협정문>과 마찬가지로 정세의 급변이나 돌발변수들로 인해 얼마든지 한 장의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다. 그러나 ‘평화협정’에는 한국전쟁의 종식과 남과 북의 군사적 대치의 해소, 서해안의 북방한계선과 같은 영토문제 정리, 그리고 유엔사와 주둔미군의 존재에 대한 정치적 타결이라는 상당히 역사적인 변화를 꾀하는 의제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미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아마도 한반도의 군사‧안보적 차원의 총체적인 패러다임은 ‘평화협정’ 체결 이전과는 질적으로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어떤 목표를 달성하려 하는가? ‘북한의 핵폐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미국의 ‘가시적인 목적’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북의 핵 폐기에 대한 사후적인 약속이라는 점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미국의 궁극적 목적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현재시점에서는 한반도에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폐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 이외에 이전과 다른 ‘새로운 목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미국의 목적이 한반도의 자주적인 통일과 남북 사이의 적극적인 군축을 통한 평화정착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오는 11월 5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인 39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ecurity Consultative Meeting)에서는 한미동맹의 현안들에 대한 총체적인 논의가 준비되고 있다. 대테러 전쟁 협력과 관련해서 이라크 파병 연장을 합의할 예정이고, 2006년부터 가시화되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의 문제와 유엔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문제, 평택 등 미군재배치와 구조전환문제, 기지반환과 전시비축탄약 문제 등이 주요 의제로 다뤄질 것이다. 특히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는 일단 공군이 제외되고 있으며, 한미 연합사를 해체하고 그 대신 한국의 독자적인 전구작전사령부(합동군사령부)를 창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엔사를 존속, 강화시켜 그 역할을 대체하는 방향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군사협조본부, 전구급 기능별 협조기구, 통합항공우주작전센터, 각 작전사별 협조기구를 신설하여 합동참모부에서 군단, 사단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통제, 개입의 경로를 세우고 있어 ‘전시작통권 환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것은 차라리 ‘한-미간의 새로운 군사협조체계 신설’이라 불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작통권 환수를 두고 노무현 정권과 ‘개혁세력’이 운운하고 있는 ‘군사주권’ ‘자주국방’이 속 빈 강정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라도 하듯, 한-미간의 새로운 군사협조체계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과 아‧태지역 신속기동군으로 재편이라는 ‘전략적 유연성’에 적합한 체계로 나아가고 있다.
6자회담의 참가국들과 북-미가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정착을 예비하고 있다는 이 시점에서 분단 57년의 군사적 긴장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온 한-미군사동맹의 침략적 성격은 오히려 보다 공고히 진화되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미국주도의 ‘평화협정’이 분단의 외형적 형태의 변화를 보장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상식적인 의미에서 ‘평화’를 구현하는 군사적 긴장의 해소를 보장해주지는 못할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당근과 채찍 전략’의 반복
미국이 현재 구상하고 있는 대북전략은 “북한의 핵무기 및 미사일에 대한 완전한 제거”와 “비용과 위험을 최소화하는 북한의 체제붕괴”를 동시에 추진하고자 했던 클린턴 시절의 ‘페리프로세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노무현이 10월 4일 도라산 역에 도착하여 “북핵문제 해결의 ‘타작마당’은 따로 있는데 나더러 또 ‘타작마당’을 벌이라는 것은 부담스럽다.”라고 발언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군사, 안보적인 문제는 철저히 미국의 권한아래 종속되고, 남한은 대북지원과 경협사업을 통해 북한의 체제변화를 추동한다는 지난 클린턴의 대북포용정책 -김대중의 햇볕정책의 ‘역할분담론’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북-미 평화협정 체결의 흐름’은 부시행정부 버전의 ‘페리프로세스’의 자장을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페리프로세스는 협상을 하나의 경로로 상정하고는 있지만 군사력 증강을 협상의 후순위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Two-Path Strategy)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으며, 결국 당시 클린턴이 북-미 협상 의제에 북한의 미사일 문제를 추가함으로서 그 이후 10년 동안 한반도의 위기는 훨씬 더 고조되어왔던 역사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결과가 진정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진전’이었는지, 아니면 미국의 패권전략 아래에서 추진되고 있는 하나의 ‘역할 분담’을 남한정부가 성실히 수행한 것에 불과했는지, 상황을 보다 냉정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평화협정’의 미망에서 벗어나자
운동진영에서는 이러한 미국주도의 거짓 ‘평화체제’가 도래할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평화협정에 ‘주한미군 철수’의 내용을 분명히 담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평화협정 체결과는 정반대의 흐름으로 가고 있는 한미동맹의 침략적 재편에 반대하며, 기만적인 전시작통권환수와 유엔사 강화를 규탄하는 대중투쟁을 제안하고 있다. 미국이 사실상 항구적인 한반도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수단으로서 ‘평화협정’을 활용하고 있는 오늘날, 미국의 기만적 술수를 폭로하고, 한-미 군사동맹을 전면적으로 거부해나가는 남북한 민중들의 반전반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개혁’과 ‘진보’의 탈을 쓰고 ‘햇볕정책’을 계승하면서, 북한에 대한 남한 주도의 경제통합을 ‘사실상의 통일’로 간주하려는 남한의 지배세력들의 위선과 기만에 대해서도 단호히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남북 민중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면, 남과 북의 정상이 두 번째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환호할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군사 패권의 우산을 북에게 강요하는 노무현 정부의 거짓화해를 오히려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현재와 같이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실리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남과 북의 대화채널로는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 통일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그러한 기만적인 남북한의 ‘통일’의 구상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반미반전평화를 확산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운동에게 일말의 유리한 조건도 제공해주지 못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제대로 된 평화협정’에 대한 미망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한-미 군사동맹을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는 남과 북의 조건 없는 평화군축의 행동, 바로 그것으로부터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