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테러동맹’의 참혹한 대가
8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한국인 19명의 석방이 합의되었다. 인질의 몸값 지불여부, 한국의 외교 협상력의 치적, 기독교의 배타적, 공격적 선교라는 맹비난 여론 등...몇 가지의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남기면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와 언론은 피랍초기부터 줄곧 사태의 원인을 ‘기독교의 무리한 선교’로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인지도 몰랐고, 따라서 파병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국군 파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국가’를 찾아간 23명의 ‘공격적 선교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21명의 피랍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 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인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험국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이 참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점령이다. 가옥과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무차별 공격하는 미국과 동맹국의 점령이 탈레반의 민간인 납치, 살해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테러와의 전쟁’에 온갖 충성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레반은 23명을 납치,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23명의 피랍자들이 ‘무리한 선교’ 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치자. 한국정부의 파병과 한-미 군사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지 않았었다면, 탈레반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장기간을 피랍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를 통해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에게 요구할 협상카드도 생각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고 배형규, 심성민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즉각 철군’ 이라는 카드를 결코 꺼내지 않았다. 잔인하고 참혹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미국과의 ‘대테러동맹’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치적을 뽐내며, 이제 살려놨으니 돈으로 값으라는 망발을 서슴치 않고 있다.
파병반대운동의 대중적 확산의 실패
이처럼 적반하장 격으로 정부가 그 뻔뻔스러운 입을 놀릴 수 있는 당당함은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그것은 탈레반이 저지른 극단적인 보복방식과 참혹한 폭력성에 의해, 정작 그 폭력을 만들어낸 미국의 점령과 한국군 파병이라는 본질이 쉽게 가려질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또한 전쟁과 파병을 반대하는 운동진영의 목소리가 정부의 이 기만적인 술수를 폭로하며,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모아나가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외국인 납치·살해라는 탈레반의 행동이 매우 강렬한 충격과 공포를 몰고 왔다는 점에 있다.
반전평화운동은 피랍사태 직후, 거의 매일 촛불집회를 개최하고, 대중 집회를 조직하여 이 사태를 한-미전쟁 동맹의 문제로, 미국의 점령와 파병이 초래한 비극의 문제로, 반전평화운동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표상되었고, 점령과 파병의 문제는 뒷전으로 밀러났다. 또한 탈레반을 포함한 이슬람 전체에 대한 ‘악마화’된 이미지가 대중의 인식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단지 보수언론이 의도된 결과라고만 볼 수 없다. 30년이 넘는 전쟁과 점령의 세월동안 악순환되고 있는 폭력, 증오의 산물인 탈레반의 외국인 납치·살해의 행위는 낯선 충격이었고, 따라서 한국의 대중들이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선과 악’이라는 천박한 대립구도 밖에 없었다.
반전 평화운동 진영 역시 이러한 판단의 공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내에서 벌어졌던 당면 핵심 요구를 둘러싼 논쟁을 되짚어보면, 이 사태를 바라보는 운동진영 내의 적지않은 시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논란의 과정은 결국 미국과 한국정부의 기만적인 작태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반전평화운동을 조직하는 것을 방해하였고, 이 사태에 대한 운동진영의 역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과 이로 인한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이 사태를 가로지르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남는다.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논란
탈레반은 23명을 납치한 직후, 아프간에 있는 한국의 동의, 다산부대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반전평화운동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기자회견(7월 21일)과 촛불집회를 시급히 조직하였고, 즉각 철군과 미국의 점령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피랍자 석방을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7월 26일 열린 국민행동 기획단회의에서는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를 슬로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탈레반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양비론으로 몰고 갈 위험(미국 반대/탈레반 반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시기 운동의 방향은 점령과 파병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토론 끝에 이 문제는 결국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었고 결국 다수 안으로 국민행동의 핵심요구는 “피랍자 석방,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되었다.
7월 말, 피랍 20일이 경과하면서 탈레반의 인질석방의 조건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행동은 당면 핵심요구에 탈레반의 ‘포로교환요구 수용’을 추가하는 것을 논의에 부쳤다. 이는 또 한 번의 논쟁을 일으켰는데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서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 문제 역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 ‘포로교환요구 수용’이 핵심적인 요구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여 진행하기도 하였다. (8월 7일, 평화·여성·환경·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논란은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일단락되었는데, 당면 슬로건을 “무사귀환,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하고 이외에 ‘포로교환요구 수용’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방식을 결합시키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당한 탈레반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은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 밖 에 없었다. 또한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으로 하여금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고 있다.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나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요구들은 각각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나름의 현실적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반전평화운동에게 던져진 질문
당면 정세에서 <국민행동>이 어떤 구호를 추가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단순히 기술적인 논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한 반전평화운동의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첫 번째 입장은 ‘테러와의 전쟁’도 비판해야 하지만, ‘테러’도 비판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은 어떤 이유에서도 용납될 수 없으며, 따라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는 반전평화운동과 결합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이 사태의 근본적 원인은 미 제국주의의 점령과 전쟁에 있기 때문에 점령과 파병에 대한 비판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의 경우, 어떤 이유에서건 ‘폭력’은 즉각적으로 거부되어야 하고, 사태를 ‘평화적으로’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편에 서게 되면서, 궁극적으로는 미국과 동맹국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의 논리와 시각에서 탈레반을 비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결론을 도출하게 된다.
미국식 ‘민주주의와 인권’을 훼손하는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서 ‘정의의 전쟁’ 역시, 폭력적 상황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방식을 나름대로 표방하고 있다. 이처럼 ‘테러와의 전쟁’이 유포하고 있는 기만적인 거짓 논리를 철저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탈레반의 행위에 대해, 즉각적인 비난의 편에 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후자의 입장은 오늘날 새롭게 재생산되고 있는 전쟁과 점령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이 민중의 평화적 권리들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미 제국주의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대항하는 저항의 수단이라는 명분으로, 인간의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희생시키는 ‘테러’의 폭력을 묵인할 수 없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을 사고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폭력의 악순환은 기존의 반제국주의 운동으로서 반전·반미운동이 ‘폭력’에 대해 새로운 시야를 확보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응하는 반전평화운동이 보다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벼리지 못했던 원인에는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충격과 긴급함에 비해, 운동진영의 이러한 인식의 공백이 토론과 성찰을 통해 채워지지 못했던 까닭에 있다. 이러한 반성은 단순히 운동진영 내의 단체 간의 입장차이로 정리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향후 전쟁과 파병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반전평화운동을 조직하기 위한 보다 정교하고 날카로운 논리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미국의 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을 보다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오늘날, 이 양자가 담고 있는 중요한 쟁점은 미완의 해답을 남기며 지속적으로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전쟁과 폭력을 동반하는 한-미동맹의 세계화
9.11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 가자, 레바논, 소말리아 전쟁으로 번져갔고, 현재는 이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테러’는 정치·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 밖 에 없다. 따라서 ‘테러’에 대한 공격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직 항구적인 전투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넓고 광범위한 전장을 필요로 할 뿐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9.11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았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은 더 이상 알카에다, 탈레반과 같이 이미 드러난 무장단체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점차 이슬람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의 위협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단지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거대한 ‘대테러 동맹’을 결성하여 범세계적인 차원의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 한-미 군사동맹 역시 이제 한반도와 동북아의 지역안보만을 향하지 않고 전 세계적 차원의 침략동맹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라크, 아프간, 레바논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대는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증오와 보복이라는 극단적 폭력을 새롭게 재생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세계화된 미국의 군사동맹들은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양산한 빈곤과 불평등의 거친 불만들을 군사적 수단을 통해 관리, 통제하려는 노력에 발벗고 나선다. 이제 동맹국들은 이슬람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악마화’된 이미지를 유포하여 각 국가 내에서, 각 지역차원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에 의한 외국인의 피랍, 살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은 미국의 점령에 동참하는 그 동맹국들에 대한 그들의 참혹한 ‘피의 보복’이지 않은가.
지난 30년 동안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대지에 미국의 점령과 대테러전쟁의 암흑을 거두어내고 어떠한 대안과 전망으로 새로운 민중의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이 탈레반의 극단적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새로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되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국가적,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성장은 어떠한 ‘평화’를 필요로 하는가? 그 ‘평화’는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즉각적인 거부’와 ‘맹목’이라는 양자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오늘날 인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전쟁과 폭력에 맞서 반전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적인 정치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대안 세계화로서 반전 평화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을 차근차근 답해나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