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의 주간지 사회와노동

그들의 격투에 민중은 없다!

신자유주의와 교육 불평등 심화의 본질

얼마 전까지는 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를 금지하는 3불정책이 교육 문제의 화두로 떠올라 대학과 교육부 간의 온갖 이념공세가 이루어지더니 최근에는 대학의 ‘내신반영비율’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내신반영비율’은 2004년 10월 28일에 확정ㆍ발표된 ‘2008학년도 대입제도’의 일부 내용으로 대학 입학 시 학생부를 중심으로 하고, 수능시험은 보완적인 자료로 활용하겠다는 것이 골자이며 교육부는 이를 통해 ‘공교육 정상화’를 이루겠다는 취지를 밝혔다. 그런데 최근 일부 사립대학에서 1~4등급 만점안을 내놓는 등 전면적인 내신 무력화 정책을 펴자, 교육부에서 내신 실질 반영비율 50%고수와 위반 시 행정적, 재정적 제재 등 강경대응 태세를 취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먼저 이 갈등의 양상은 이렇다. 내신반영비율을 높이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수능을 중심으로 한 성적순 전형이야말로 사교육 팽창의 원인이며 우리나라 빈부격차를 감안하지 않은 불공정한 입시 제도라고 주장한다. 학생의 성실성과 학교 생활이 반영되는 내신을 반영하지 않고 수능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려는 것은 불평등한 처사라는 것이다. 또 내신 성적이 좋아 입학한 학생이 대학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대학의 주장은 편향적 논리이며 대학 경쟁력은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이다.
한편 이에 맞서 대학들은 ‘내신’은 학생 선발에 있어서 변별력이 떨어질뿐더러 사교육을 축소시키는 것에도 전혀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학교 내 치맛바람이 거세지고 학생들이 ‘수능 대비’ 학원에서 ‘내신 대비’학원을 다니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정책으로는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안되고, 그것으로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데 기여하는 대학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공공의 이익에 부합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내신 실질반영률 50%’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되게는 경쟁력 확보를 위한 대학의 자율성 보장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올해 6월부터 불거진 갈등은 지난 7월 6일 교육부의 정책 전환으로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내신’ 정책에 대해 각 대학들이 강하게 반발하자 교육부총리는 ‘내신 반영 50%를 따르지 않으면 제재 하겠다’는 입장을 철회하고 “내신 반영비율은 금년에는 가급적 최소 30% 수준에서 출발하고 향후 3~4년 이내 단계적으로 목표치에 도달해 줄 것을 당부한다.”라는 ‘호소’로 정책기조가 바뀌었다. 그러나 각 주요 대학들이 ‘최소 30% 반영’에 못 미치는 입시안을 내놓고 있어 교육부의 향후 대응이 변수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내신 강화가 공교육 정상화의 키워드이며 대학 교육의 공공성을 보장한다.’ vs ‘내신은 우수 인재를 뽑기에 변별력이 떨어지고 오히려 대학 교육의 성장을 저해하고 정부 정책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이 현재 전개되고 있는 갈등 양상이다. 그런데 과연 내신 반영률이나 입시 전형이 현재 교육 문제의 진정한 쟁점인가. 내신을 중심으로 한 양자 모두의 주장은 마치 ‘공교육 정상화’나 ‘대학 교육의 공공성’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외피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응축된 교육 문제

현재 남한의 사교육 팽창과 과도한 입시 경쟁 등의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라는 것에는 누구나 이견이 없다. 그런데 ‘내신’을 둘러싼 갈등은 이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보다 구조적인 문제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한의 교육은 ‘과잉 교육’과 ‘과소 교육’으로 축약해 설명할 수 있다. 청년 실업의 증가, 대학원 진학 증가, 취업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해외 유학과 어학 연수의 폭발적인 증가 등의 각종 사회적 현상은 더 이상 대학 졸업장이 빛나는 인생을 보장하는 열쇠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고용이 불안정해지고 실업이 만연하면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상급교육기관에 진학하거나, 사교육을 통해 더 많은 교육을 받게 되는 현상이 ‘과잉 교육’이다. 그리고 이것과 함께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등 교육 기관의 교육 내용들도 법인 자본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재편되고 상업적 학문이 대학의 교과과정을 지배하는 등 전반적으로 대중 교육의 질을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교육의 질적 변화가 ‘과소 교육’이다. 이처럼 과소 교육의 일반화는 다시 고등 교육의 양적 팽창으로는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을 보증하지 않으면서 계층상승을 위해 다시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악순환을 낳으면서, 교육 기간의 무한한 확장을 낳는다.
그런데 이렇게 과잉/과소 교육으로 귀결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미 언급되었듯 청년 실업의 증가,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가 그것이다. 사실상 대학의 서열과 노동시장에서의 지위가 일치하는 남한에서 명문 대학으로의 진학을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입시 위주의 교육이 자리 잡고, 사교육이 팽창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공교육의 정상화’라고 일컬어지는 교육의 목표는 극심한 불평등, 대량 실업, 궁핍화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현재 이와 같은 응축된 모순을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자체가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한 필수적인 변혁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황기의 고통과 교육 문제를 가장 체감하며 교육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을 대중들은 당장 이러한 체제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과주의’라는 효과적인 포섭 장치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대중 교육에 있어서 성과주의는 대중을 관리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이데올로기로 지배 계급에게 활용되었다. 지금과 같은 학교 교육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교육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요구가 있었을 때 법인 자본은 그 요구를 부분적으로 포섭하여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면서도 계급 투쟁을 완화하는 기제로 대중 교육의 형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자본형태의 변화와 조직적 혁신에 따라 지식 노동자가 육체 노동자에 비해 고임금을 받게 되면서 개인의 교육적 성취가 경제적 성취를 결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성과주의 이데올로기는 더욱 강화된다. 이로서 대중 교육은 외연적으로는 평등한 교육을 제공하지만 개인의 교육적 성취가 경제적 성취를 결정하는 ‘성과주의’를 통해 대중 내부의 분할과 경쟁을 정당화한다. 즉, 착취와 예속이라는 계급적 쟁점을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함께 더욱 심화되는데 노동의 불안정화와 신축화가 일반화되고 계층 상승의 가능성이 축소됨에 따라 대중내부의 경쟁이 더욱 격화되었고, 빈곤과 실업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법인 자본과 국가는 오히려 고등 교육을 확대하여 성과주의를 통한 ‘포섭’이라는 환상을 유포하고 계급적 쟁점을 효과적으로 은폐한다. 그리고 남한에서도 역시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진행되어 오면서 불황기에 오히려 대중 교육이 확대되는 경향이 확인된다. 즉 남한의 교육은 ‘과잉 교육’과 ‘과소 교육’이라는 특성이 유지ㆍ발전되어 온 것인데 그 와중에 ‘성과주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대중 내부의 경쟁으로 돌려 은폐시키는데 활용되어 왔던 것이다.

애초에 그들의 싸움에는 ‘민중’이 없다.

그런데 이미 대중 내부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는 성과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나 운동의 해법을 명확하게 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교육부의 주장처럼 ‘내신’으로 (실제 이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사교육을 받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대학의 문을 더 활짝 열어놓아 ‘빈부 격차’ 해소나 소위 말하는 ‘공교육 정상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각 대학의 주장처럼 대학의 경쟁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하고 ‘수능’으로 검증된 학생을 선발하는 것으로 공공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인가. 근본적으로 과잉 교육과 과소 교육, 또 그것을 만들어내는 구조는 문제삼지 않고 ‘내신’ 정책을 통해 그 동안 사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더 많은 사람들에게도 대학의 문을 열어주겠다는 교육부의 정책은 빈곤과 불안정한 노동에서 발생하는 대중의 불만과 불안을 또 다시 ‘성과주의’로 포섭하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대중에게는 ‘내신’이든 ‘수능’이든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는 달라질 바 없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마치 더 많은 사람이 공정한 경쟁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포장하기에 좋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이 주장하는 ‘대학의 자율성과 경쟁력’이라는 것 역시 과잉/과소 교육과 성과주의를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적인 결정권을 달라는 의미로서 교육부의 근본적인 정책 방향과 일치한다. 이렇게 볼 때 ‘내신’을 둘러싼 교육부와 대학의 갈등은 외면적으로는 ‘공교육 정상화’에 대한 공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교육이라는 쟁점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기를 더 효과적으로 지연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견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대중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조삼모사’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신자유주 교육 개혁이 그래왔듯 현재 ‘내신반영률’논란 역시 진정한 문제는 가리워져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저항을 그곳에서 멈추게 하고 체제 내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내신’을 둘러싼 갈등의 이러한 본질을 파악하는 가운데 교육/자본/국가의 구조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인식하고 교육이라는 쟁점이 내포하는 정치적 함의를 찾아 운동의 방향을 발견하는 것이다. 불황기에 오히려 고등 교육이 확장되는 ‘과잉 교육’ 양상은 자본의 구조적 위기에서 발생한 불안정한 삶에 대한 불만을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다’는 ‘성과주의’ 논리로 포섭해내는 일련의 과정으로 ‘내신’을 둘러싼 갈등 역시 과잉교육이나 성과주의는 건드리지 않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가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지금 우리 앞에는 놓여진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교육개혁’의 갈등과 쟁점 속에서 보편적이고 변혁적인 전망을 잃지 않는 저항을 만들어내는 것이 현재적인 과제로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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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 교육 , 내신 , 내신반영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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