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한국 21〉은 우리의 희망일 수 있는가?
- 정부여당의 양극화 대책에 대한 분석과 비판
'참여복지'는 '항목만 참여하는 복지'?
내년 복지예산이 54조로 전체 예산의 4분의 1이나 된다는 발표를 접하며 많은 사람들이 '혹시나'하는 기대를 가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시나' 내막을 알고 보면 이러한 기대는 애당초 접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산의 대부분이 뻥튀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다른 분야에 속했던 예산항목들, 심지어 사회복지부처 인건비와 기본사업비까지도 복지부문 예산에 포함되어 있다. 민주노동당 심상정 의원에 따르면 "내년도 실질적인 복지예산을 보면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합친 회계예산을 기준으로 올해보다 1조6891억 원 늘어나는 정도"라고 한다. '참여복지'가 '항목만 참여하는 복지'로 전락한 꼴이다.
실질적으로 증액된 예산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의 확대, 차상위계층에 대한 의료, 보육 등의 지원 확대, 자활 및 사회적 일자리 지원의 확대 등이 눈에 띈다. 그밖에 노인일자리 증대, 치매 중풍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확충, 중증 장애인 장애수당 인상 등의 사업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정부와 여당이 이른바 양극화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9월 26일 발표한 〈희망한국 21 - 함께하는 복지〉 대책의 핵심 내용들이다. 따라서 내년을 포함하여 노무현 정부 집권 하반기의 복지정책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희망한국 21〉이 과연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자세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2조원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코미디
〈희망한국 21〉은 "양극화가 이대로 진행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갈증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지속적인 성장기반 마저 무너질 수도 있다"(2005년 노무현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특히 분배중시 정책이 성장둔화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분배문제에 대한 경시가 성장둔화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사회복지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복지투자는 '성장잠재력 훼손'이라는 관념을 타파하고 사회안전망의 개혁과 근로연계복지 투자 확대를 통해 소비를 확대하고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서 '복지투자로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운운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생산적복지-참여복지로 이어지는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따른 필연적인 사회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되, 근로연계복지(workfare)를 도입하여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노동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사회, 복지정책의 핵심 요소이자, 생산적복지-참여복지의 기조이기도 하다.
물론, 복지의 직접적인 투자론이 제시되었다는 점을 새로운 측면으로 볼 수 있다. 〈희망한국 21〉은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나 고령화를 수반하는 사회에서 '복지 분야에 대한 잠재수요'를 생각한다면 전통적인 공공투자보다 복지의 인프라 정비 등에 대한 투자가 경제파급효과나 상승효과가 크다며 케인즈적인 유효수요 자극책으로서의 복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케인즈적 경기부양정책은 금융의 특권을 제한하는 타협을 조건으로 한다. 타협이 역전되어 금융세계화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복지가 유효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는 주장은 허구에 불과하다. 전체 재정의 1%에 불과한 연당 2조원 규모로 투자와 유효수요의 자극 운운하는 코미디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의 빈곤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만성화되고 구조화된 현실이다. 외형적인 경기회복 추세에도 불구하고 소수 상층부를 제외한 다수 민중들의 소득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경제에서 창출된 이윤이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몇몇 소수 부유층들로 이전되는 금융화의 메카니즘과 이윤 창출의 극대화를 위한 불안정한 노동의 확산 때문이다. 〈희망한국 21〉의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이라는 비전이 '안정적 고용없는' '금융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의 마련과 위기의 관리로서의 복지로 귀결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빈약한 기본생활보장과 현실 빈곤의 무게
〈희망한국 21〉의 구체적인 정책방향은 사회안전망 확충으로 국민기본생활보장 및 사회통합 제고, 사후지원에서 탈빈곤 및 빈곤예방으로 정책 패러다임 전환, 사회보장제도의 형평성 및 건강성 제고, 저출산·고령사회에 대비, 지속가능한 사회안전망 구축으로 제시된다. 그중에서 사회보장제도는 정책 대상에서는 빠져 있어 크게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선 및 차상위 계층에 대한 지원을 확대, 빈곤층에 대한 빈곤예방 및 탈빈곤 정책의 강화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책들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전자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살펴보자. 먼저 〈희망한국 21〉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내실화를 통해 최저생계비 이하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실화는커녕 극히 일부분의 개선에 머무르고 있다. 정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기초법의 엄격한 수급조건, 특히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하여 현재 수급자의 두 배가 넘는 372만 명이 기초생활보장에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빈민운동은 부양의무자 기준을 단계적으로 폐지해야 하며 주거용 재산 등에 대한 재산 및 소득 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번 대책은 부양의무자의 범위는 그대로 둔 채 부양능력의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을 최저생계비 120%에서 130%로 고작 10% 완하하는 것에 그쳤다. 이로 인해 새로 수급자가 되는 규모는 약 11만 명으로 예상된다. 결국 372만 명의 비수급대상자 중 나머지 361만 명은 또다시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물론 2단계로 부양의무자 범위 및 판정기준을 추가 확대하겠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지금의 추세를 볼 때 그리 커다란 개선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으로 〈희망한국 21〉은 차상위계층에 대한 욕구특성별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기존 제도의 커다란 사각지대였던 차상위계층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고 안정적인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지원하기 위해 의료, 주거, 보육, 교육, 자활 및 고용지원, 노인, 장애인, 아동 등 다양한 수요 및 인구특성별로 급여, 수당지원 정책들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들을 부분적으로 개선, 확대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기초법 수급 대상자 중증 장애인에게 제공되고 있는 장애수당을 6만원에서 7만원으로 인상하고, 차상위계층으로 확대한다는 식이다. 7만원이라는 금액은 중증 장애인이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개인에게 전담시키는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물가인상률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인상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통계청 조사만 보더라도 하위소득 10%의 월평균 소득은 46만원에 불과하여 매월 42만 원의 적자를 부채 등으로 충당하며 살고 있다. 500만 명이 부채의 악순환에 자신의 생존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다. 〈희망한국 21〉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안전망은 너무 성기고 또 약해서 도저히 이런 현실의 무게를 담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희망한국 21〉은 빈곤층의 자립과 안정적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
다음으로 두 번째 정책방향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정책을 평가해보자. 〈희망한국 21〉은 산업과 노동시장에서의 양극화가 소득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야함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일자리가 없는 근로능력자에 대해서는 자활사업, 사회적 일자리를 확대하여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취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으며 취업해 있지만 빈곤한 근로능력자에게는 직업훈련 등의 고용서비스를 강화하고 근로소득 보전체계(EITC) 도입을 추진하겠다는 대책을 제시한다.
우선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지금의 노동의 불안정화가 단지 직업훈련이나 취업에 대한 정보의 부족으로 인한 현상에 불과하며 결국 개개인의 능력부족에 책임이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국가의 책임을 방기하는 구실이 된다는 데 가장 커다란 문제가 있다. 근로소득 보전체계 역시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당장의 소득증가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불안정 노동의 구조적인 측면을 은폐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또한 역으로 이것이 빈곤층에 대한 근로의무의 강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현행 자활제도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기초법)에 포함되어 있어 취업 및 근로능력이 취약한 근로능력자에게 가혹한 조건부 수급(수급의 조건으로 자활 참여를 강제)의 굴레를 씌우고 있다. 시장이 요구하는 일정한 기준의 노동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생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부당함에도 마치 이들이 게을러서 개인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노동을 기피하는 것으로 역공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현재 진행 중인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 빈곤층의 노동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 혹은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의 측면 모두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자활 사업을 종료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설령 취업이 되더라도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어 재직기간이 짧으며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일자리는 1인당 월 58-68만원에 평균 9-10개월의 고용기간을 보장하는 수준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을 뿐이다.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를 단순히 확대하는 것은 빈곤을 만성화, 구조화하는 불안정노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강화하고, 진실을 은폐한다. 기초법과 자활제도를 분리하여 기초법은 근로능력 유무를 떠나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며, 자활제도를 별도로 신설하여 선택적 참여보장과 제도적 지원을 통해 실질적인 자립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장기적 시야 속에 한 걸음씩 전진하자
개별 민중들에게는 죽음 직전의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 오고 있는 빈곤의 문제는 대증요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소위 '양극화 문제'로 제기되는 빈곤의 심화와 불평등의 확산을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이에 대한 지배체제의 반응으로서 금융세계화와 노동의 불안정화의 필연적인 효과로 인식하자고 주장해 왔다. 즉 빈곤의 문제는 체제를 변혁하는 장기적인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해결 가능하다. 다시 말해 당장 손에 잡히는 경제적인 지원을 쟁취하는 것도 중요할 수 있지만 어떻게 쟁취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기본적인 생존과 생활에 대한 보장,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요구를 쟁취하는 투쟁의 과정이 운동의 밑거름이 되고 다시 이것이 더 큰 투쟁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해나가야 한다.
올 하반기에는 특히 기초법의 개정이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희망한국21과 병행하여 작성된 기초법 개정안에는 엄격한 수급자 선정 기준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조건부 수급의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활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면서 자활 사업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초법의 전면 개정, 자활지원법의 제정을 요구하되 〈희망한국 21〉을 비롯한 정부 대책의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대중화하는 한편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기층 빈민대중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워내는데 초점을 두고 싸워 나가야 한다. 우리 모두 힘과 뜻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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