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의 주간지 사회와노동

북경여성선언문 채택 10년 후,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지난 2월 28일부터 3월 11일 뉴욕에서 ‘유엔 여성지위위원회’ 49차 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는 1995년 북경 4차 유엔세계여성회의에서 채택된 ‘북경여성선언’ 및 ‘북경행동강령’을 채택한 이후, 10년 동안 각 국 정부가 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지를 평가할 목적으로 열렸다. 여성선언문은 ‘성주류화’를 여성발전의 기본방향으로 본격적으로 제시했으며, 북경행동강령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요소를 제거하고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각 국 정부와 유엔의 행동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 회의에 참석하여 그 동안 북경행동강령이 제시하는 바에 따라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한 장치들을 꾸준히 마련하고 실행했다고 밝혔다. 여성발전기본법 제정(1995)을 시작으로 하여 여성부 신설(2001) 등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여성의 공적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을 중요한 성과로 꼽았다. 성폭력특별법(1994), 가정폭력특별법(1997), 성매매방지법(2004)을 제정하여 여성의 인권을 진전시키고 여성에 대한 폭력 및 성적 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밝혔다. 신설된 여성부는 가정과 직장에서 성 평등을 이루어내기 위해 호주제를 폐지하고 양육을 지원하는 한편, 직장 내 성희롱을 방지하고 고용에 있어서의 평등을 이루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했다. 그 결과로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이전에 비해 높아졌다고 했다. 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이와 같이 새로 도입된 법·제도적 장치들이 공직에 진출한 여성들의 비율을 늘이고 차별적인 요소를 제거했다는 측면에서 여성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성주류화 전략’에 따른 효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여성 취업자의 수는 점차 늘고 있지만, 전체 여성노동자 중 70.5%가 임시일용직이며, 임금은 남성의 63%이고 노조가입률은 5.2%에 불과하다는 통계수치가 제시해주듯, 오히려 대다수의 여성들에게는 저임금에 불안정한 일자리가 제공되었을 뿐이다. 여기에 출산, 양육을 비롯한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이전보다 많은 의무까지 더해져서 여성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된 것이 현실이다. 여성의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할 것처럼 선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대다수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여성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똑바로 보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여성: 구조조정의 충격 흡수판에서 저출산 시대를 극복할 자원으로

북경행동강령이 채택된 후 여성들이 맞닥뜨리게 된 현실은 ‘경제위기의 안전판’으로서 이중적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97년 IMF 외환위기로 정리해고가 합법화된 후, 그 1순위는 바로 여성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구조조정으로 사회서비스 관련 예산이 삭감되어 가계유지비용이 급증하자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가족구성원을 보살피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의무는 더욱 강화되었다. 동시에 노동의 불안정화 경향에 따른 가계소득의 감소로, 여성들은 부족한 생계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열악한 노동환경을 감내하며 자신의 노동력을 출혈적으로 판매해야만 했다. 가족 내에서 부여받는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과 노동시장에서의 부차적인 지위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여성을 이중적 고통의 악순환에 빠뜨렸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재생산노동의 일차적 책임자이자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여성들의 이중적 고통을 고착시켰다. “여성인력의 계발과 활용”, “가사와 직장생활의 양립”으로 표현되는 여성정책의 기조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함께 도래한 남성생계부양자 중심의 가족형태의 위기, 그리고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최근에는 이러한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는 것에 여성을 동원해 내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충격 흡수판의 역할을 담당하던 여성들은 이제 ‘저출산-고령화’로 표현되는 재생산의 위기를 극복할 ‘인적 자원’으로 호명되고 있다. 2004년 제정된 건강가족기본법은 자녀양육과 노인부양의 역할을 수행하는 가족 형태를 ‘건강가족’으로 장려하고 이러한 형태의 가족에 한정하여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법은 여성들이 이혼을 선택할 권리보다 가족을 지킬 의무를 더욱 강조하며, 출산·양육에 대한 책임은 강조하는 반면 피임에 대한 지원은 포기한다. 더불어 정부는 각종 출산장려책을 제시하며 출산과 양육에 대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대응을 여성정책의 일차적 목표로 삼는 데에 따른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양성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내세운 ‘여성부’가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옹호하고 재생산의 일차적 책임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여성가족부’로 재편될 예정이다. 결국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확대하고 여성의 발전을 꾀한다던 지난 10년 동안의 여성정책은 노동의 불안정화에 조응한 ‘빈곤의 여성화’를 정당화하거나 관리하려는 시도였으며, 여성의 권리를 축소하면서 이중적인 의무는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빈곤과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의 투쟁은 계속된다.

‘성 주류화’를 기반으로 하는 여성정책이 대두된 지난 10년 동안,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의 여성화에 맞서는 여성들의 투쟁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리해고가 합법화 된 이후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되었던 현대자동차 식당노동자들은 성차별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현실을 폭로하며, 정리해고를 막아내기 위한 투쟁의 선두에 나섰다. 골프장 경기보조원, 보험모집인, 학습지 교사 등 대부분이 여성으로 이루어진 ‘특수고용직’의 실상을 드러내고 노동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역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비정규직-저임금 노동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임금을 보장한다는 취지와 정반대로 이들을 저임금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최저임금제의 허울을 비판하며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투쟁에 가장 앞장섰다. 가족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더 이상 가족 내에서 소화되지 않는 간병노동을 수행하면서도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극심한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간병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보살핌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라는 중요한 쟁점을 제기했다. 신자유주의 농업 구조조정으로 인해 농촌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농사 이외에도 생계를 보충하기 위한 부업에다 가사노동까지 3중의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농민들 역시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선두에 나서왔다. 성매매방지법 시행 이후,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은 더욱 분명히 확인되고, 성매매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성매매 여성들의 시민권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움직임이 전개되고 있다.

여성들의 연대, 여성운동의 자율성을 강화하자!

95년 북경여성대회가 열리던 당시, 이를 계기로 결집한 여성들은 북경행동강령과 별도로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것을 여성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이에 관한 17가지의 요구목록을 스스로 작성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5년 후 이 요구목록을 바탕으로 지구를 횡단하는 세계 여성들의 릴레이 행진을 진행하였고, 여기에 결합했던 각 국의 여성운동들은 세계여성행진(World March of Women)이라는 세계적인 여성들의 네트워크를 결성했다. 이러한 세계여성행진이 결성되는데 단초를 제공했던 북경여성대회 10년이 된 올 해, 이 릴레이 행진이 다시 한번 진행된다. 작년 세계여성행진 총회를 통해 채택된 ‘인류를 위한 세계여성헌장’을 널리 알려내고 전쟁을 동반한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요구를 알려내는 활동이 이 행진을 통해 진행된다. 이 행진은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시작되었으며, 지구를 횡단한 후 세계 빈곤철폐의 날인 10월 17일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 파소에서 마무리 될 예정이다. 세계여성행진은 여성들의 고유한 권리의 문제를 사회변혁과 결합시키며 대안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고 있다. ‘성주류화’에 따른 정책이 제공하는 기회가 일부 여성들에게만 한정된다는 점에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착취를 폐절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이렇듯 여성들 스스로가 행동에 나서고 여성들 간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다. 현재 여성운동의 주류적 경향이 한정된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기회를 절대화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수렴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들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그 요구를 집단화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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